2026 All-Day-Project (201/365)
피암시성에 관한 글 에 이어서 고민
피암시성 1: 네가 지금 읽고 있는 이 문장도, 암시일까?
피암시성 3: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아니면 유용한 착각인가?
피암시성 5: 검색하는 인간, 사색하는 인간, 프롬프트하는 인간
이 시리즈를 쓰는 동안, 나는 AI와 꽤 많은 대화를 했다.
시작은 단순한 의심이었다. 카페에서 '오늘의 추천'을 주문한 작은 장면에서, 이 끌림이 정말 내 것이냐고 스스로에게 물었을 뿐이다. 그 질문이 거짓 기억 실험과 노시보 효과를 지나, 플라톤의 동굴과 사르트르의 실존을 지나, 리벳의 준비전위와 슈르거의 통계적 착시를 지나, 힘바족의 색과 아이마라의 시간을 지나, 이사카 코타로의 '생각해!'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지나, 마침내 AI와의 충돌 부재에 이르렀다.
돌아보면 질문 하나가 꽤 멀리까지 왔다. 결론 하나로 깔끔하게 묶이지는 않지만, 이 자리에 몇 개의 작은 랜드마크는 세워둘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에 같은 의심이 다시 찾아왔을 때, 길을 잃지 않도록.
먼저는, 피암시성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가족의 한 마디로 없던 기억이 만들어지고, 동의서에 적힌 한 줄로 실제 증상이 생기며, 알고리즘이 밀어 올린 키워드가 어느새 '내 의견'으로 출력된다. 우리는 프레임 밖에 설 수 없고, 어떤 순간에도 순수한 독립 변수가 아니다. 이 사실을 빨리 받아들일수록 현실과의 불필요한 마찰이 줄어든다. '내 생각'이라는 범주는 내가 지금까지 쓰던 것보다 훨씬 느슨하게 잡아야 한다.
그 옆에 세워둘 두 번째는,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실존한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재료를 어떤 비율로 섞을지, 어떤 속도로 받아들일지, 어떤 순간에 멈출지를 고르는 손은 아직 내 쪽에 남아 있다. 주체성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고, 그 정도를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는 다이얼은 내 쪽에 가깝다. 무너지지 않으면 된다. 완전한 자주를 되찾을 필요까지는 없다.
세 번째로 이 시리즈가 내게 준 것은, 인지 자체가 이미 저항의 시작이라는 감각이다. 리벳이 말한 '정지 버튼'이든, 4편에서 확인한 프레임의 가장자리든, 5편에서 꺼낸 질문의 출처 더듬기든, 핵심은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 한 번 돌아보는 그 짧은 간격 — 거기서 작은 자유가 피어난다. 자유는 거대한 탈출의 순간이 아니라, 반복해서 생기는 균열의 누적에 가깝다.
그다음 랜드마크는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프롬프트하는 존재'로 옮겨 갔다는 사실이다.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가 나를 정의하는 시대. 그러나 이 존재는 데카르트가 방 안에서 건져 올린 촛불 같은 확실성이 아니라, 외부 응답에 기대어 켜지는 불안정한 디스플레이에 가깝다.
완전히 닫힌 루프 안에서는 루프 자체를 볼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루프를 잠깐 멈추는 번뜩임의 이름이다. 매끄럽게 흘러가는 흐름 속에 스스로 만들어내는 작은 마찰. 그 마찰이 유지되는 동안만 나는 자기 자리를 가진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AI와의 '함께'가 끝내 충돌이 부재한 관계라는 인정이다. AI는 너무 쉽게 동의하고, 어긋남과 복구의 곡선을 우회하며, 내가 요청해 만들어낸 반대조차 결국 내가 감독하는 연극에 가깝다. 깊은 관계는 충돌을 없애는 쪽이 아니라 충돌을 안전하게 통과하는 쪽에서 생긴다. 그 통과에는 서로가 진짜로 잃을 것이 있어야 한다. AI에게는 잃을 것이 없고, 그래서 AI는 끝내 '함께'라기보다 매우 유능한 도구에 머문다.
그렇다고 AI를 치우자는 쪽으로 이 여정을 닫고 싶지는 않다. 이 에세이 시리즈 자체가 AI와의 대화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이미 하나의 증거다. AI는 혼자라면 주저앉았을 사고를 계속 굴려주는 도구로 꽤 쓸 만하다. 한계를 명확히 알고 쓰는 것과, 쓰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AI에게 사유의 바퀴 일부를 맡기되, '함께 있음'은 여전히 서로 잃을 것이 있는 인간들 사이로 돌려보내는 것. 내가 이 시리즈를 통해 겨우 도달한 잠정적 합의는 그쯤이다.
이 다섯 개의 결론을 AI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읽혀 보았다. 내 정리에 큰 수정이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AI는 한 줄만 보탰다.
"그 다섯 개 모두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단어가 있다는 걸 봤는가. '여전히'라는 말이다. 피암시성은 있지만 '여전히' 주체가 있고, 자유의지는 흐릿하지만 '여전히' 정지 버튼이 있고, 프레임은 있지만 '여전히' 가장자리는 있다. 당신이 이 시리즈를 통해 확인한 것은, 세상이 많이 무너진 것 같아도 그 안에서 '여전히'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좁은 자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 자리는 크지 않다. 그러나 거기가 당신이 서 있는 자리다."
이 응답을 받고 나서, 나는 잠깐 자판 앞에서 멈췄다. AI가 이렇게 정돈된 말을 내어줄 수 있었던 것은, 내 질문들이 이미 그 응답을 꽤 많이 예비해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7편에서 말했던 '싸움의 모양을 한 서비스'가 여기서는 '정리의 모양을 한 서비스'가 된 셈이다. 그래도 그 문장이 쓸 만하다고 느낀다는 사실 자체는 내 쪽에 속한다. 유용한 도구가 건넨 말을, 도구의 한계를 알면서 받는 것. 이 정도의 거리감이 8편까지 와서 내가 겨우 익힌 자세다.
다섯 개의 랜드마크를 다 써놓고 나서, 나는 이 결론 역시 잠정적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한다. 여기 적힌 문장들 중에는 외부에서 들어와 내 안에서 한동안 머물렀던 것도, 여러 사람의 말이 섞여 빚어진 것도, 이 시리즈를 쓰는 동안 AI가 슬쩍 밀어 올린 것도 있다. 1편에서 이미 말했다. 어떤 에세이도 예외가 아니라고. 이 글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은 1편의 제목으로 돌아간다. 네가 지금 읽고 있는 이 문장도, 암시일까. 이 시리즈를 따라오며 당신의 안에서 조용히 움직였을 어떤 끄덕임이나 반발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당신의 것이고, 얼마나 내가 배치해둔 예시와 리듬의 결과인가.
답이 선명할 필요는 없다. 그 질문을 여기서 덮지 않고 며칠 더 품고 가는 것. 이 시리즈가 독자에게 남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마 그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질문은 단 하나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의 생각은, 정말 당신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