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하는 인간, 사색하는 인간, 프롬프트하는 인간

2026 All-Day-Project (198/365)

byJamin

피암시성에 관한 글 에 이어서 고민

피암시성 1: 네가 지금 읽고 있는 이 문장도, 암시일까?

피암시성 2: 외부의 것을 받아들인 나도, 나인가?

피암시성 3: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아니면 유용한 착각인가?

피암시성 4: 우리는 프레임 밖에 설 수 있는가?



2005년, 일본 작가 이사카 코타로는 『마왕』이라는 이상한 소설을 썼다.


무대는 현대 일본인데, 이 나라가 아주 천천히 이상해진다. 이누카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젊은 정치인이 등장해 사람들의 답답함을 단호한 말로 풀어준다. 라디오에서, TV에서, 거리 연설에서. 그의 말투는 시원하고, 논리는 명쾌하다. 사람들은 그를 '속 시원하다'고 말한다. 그 시원함이 어느 방향으로 자신들을 끌고 가고 있는지는, 대부분 따로 묻지 않는다.


주인공 안도는 이 흐름이 불안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기묘한 능력을 하나 가지고 있다. 머릿속으로 구성한 말을 근처에 있는 다른 사람의 입으로 나오게 하는 힘이다. 안도는 이 조용한 무기로 이누카이의 연설을 아주 조금씩 비틀어본다. 그리고 안도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끊임없이 되뇌는 말이 하나 있다. "생각해. 생각하라고."


이 말의 뿌리는 안도의 어린 시절 TV다. 위기에 몰린 드라마 주인공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해, 생각해"라고 중얼거리던 장면. 훗날 만화판에서는 이 "생각해!"가 안도의 입버릇으로까지 확장된다. 이사카가 20년 전에 한 이야기는 결국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게 가장 무섭다는 것.


『마왕』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이 다소 과장된 경고라고 생각했다. 지금 다시 들여다보니, 과장이라기보다는 꽤 태연한 묘사에 가깝다.


생각하기. 그 단어를 정식으로 집요하게 대한 사람을 한 명만 꼽자면, 나는 역시 데카르트를 떠올린다. 17세기 유럽의 어느 겨울, 데카르트는 방 하나에 틀어박힌 채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외부 세계가 꿈일 수 있다. 내 감각이 속임수일 수 있다.


수학조차 악령이 나를 홀리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는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가 남는다. 의심하고 있는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문장은 의심의 잿더미에서 건져 올린, 가장 외로운 자기 확인이었다.


데카르트의 '생각하기'는 극단적으로 내향적이다. 외부 세계를 전부 뒤로 밀어둔 상태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한다. 질문도 내 것이고, 답도 내 것이다. 오늘의 기준에서 보면 비효율의 극치다. 생각 하나를 정리하는 데 밤을 새고 바카라을 쓴다. 그런데 그 비효율의 끝에서만 건져 올릴 수 있는 문장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이 에세이를 쓰면서 새삼 깨닫는다.


데카르트의 반대편에는 현대의 우리가 있다. 우리는 사색은커녕 능동적인 검색조차 잘 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이 밀어 올리는 것을 위에서 아래로 훑는다. 유튜브가 추천한 영상을, 피드가 올려준 게시물을, 큐레이션된 뉴스를.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스크롤하는 손가락이지, 질문하는 머리가 아니다. 『마왕』 속 군중이 이누카이의 말을 '시원하다'고만 느꼈던 것은, 스스로 그 말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해 볼 에너지를 이미 다른 데 써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사이에 프롬프팅이 끼어든다. AI에게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어디에 놓아야 할까.


검색은 이미 존재하는 문서를 키워드로 호출하는 일이다. 질문이 있긴 한데 단어 수준이다. 사색은 질문도 답도 내 안에서 나온다. 바깥의 목소리를 잠깐 꺼두어야 가능한 행위다. 프롬프팅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 문장으로 질문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사색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답이 외부에서 즉시 도착한다는 점에서는 검색의 직계 후손이다. 스스로 질문을 길게 다듬어 본 사람은 안다. 질문의 모양이 잡히는 순간, 답의 절반쯤은 이미 자기 안에서 윤곽을 드러낸다는 것을. 프롬프팅의 사색적 성분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출 수 없다. 현실에서 우리의 프롬프트는 대체로 짧고 충동적이다. 이전에 본 AI의 답이나 누군가의 게시물을 살짝 변주한 것이 많다. 그러니 프롬프팅 역시 '검색에 가까운 프롬프팅'과 '사색에 가까운 프롬프팅' 사이의 긴 스펙트럼이다. 같은 행위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 질문의 무게는 천차만별이다.


나는 이 정리를 AI에게 직접 들고 갔다.


"그러니까 프롬프팅은 검색과 사색 사이의 하이브리드 같은 거네. 사색의 흔적을 얼마나 남기느냐에 따라, 같은 프롬프트의 깊이가 달라지는."


AI는 예상과 다른 각도를 꺼냈다.


"어쩌면 분류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검색이냐 사색이냐 프롬프팅이냐가 아니라, 그 질문이 어디서 왔느냐. 광고에서 왔는가. 알고리즘이 밀어준 영상에서 왔는가. 유행어에서 왔는가. 아니면 당신이 오래 품어온 불편함에서 왔는가. 질문의 출처가 정해지는 순간, 당신은 이미 어떤 인간인지 거의 드러나 있다."


깊이의 스펙트럼을 가로지르는 수직의 질문이었다. 정보 소비의 양식보다, 질문의 기원. 데카르트에게 그것은 '의심 끝까지 내려간 자기 자신'이었고, 이사카의 안도에게 그것은 '다들 그렇다고 하니 받는 말들에 대한 저항'이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오늘 어디쯤에서 출발하고 있을까. 키보드에 손을 얹기 전에, 질문의 출처를 한 번 더듬어보는 정도의 간격은 필요해 보인다.


이 시리즈를 쓰기 시작한 이후로 내 프롬프트 입력 속도는 조금 느려졌다. 쓸 때마다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문장은 어디서 시작되고 있는가. 방금 받은 외부 자극의 반사인가, 한참 묵혀두었던 무엇인가. 답이 매번 분명한 것은 아니다. 다만 묻는 습관만 붙어도, 스크롤은 조금 덜 자동화된다.


그 정도의 느려짐이 『마왕』의 안도가 "생각해!"라고 자기에게 말하는 장면과, 내 안에서 조용히 이어진다.


그래서 오늘의 질문은 이것이다.

오늘 당신이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의 재료는, 어디에서 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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