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95/365)
피암시성에 관한 글 에 이어서 고민
피암시성 1: 네가 지금 읽고 있는 이 문장도, 암시일까?
1편을 쓰고 나서 며칠이 이상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괜찮았다. 실험을 정리하고, 내 생각의 상당 부분이 외부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꽤 담담하게 적어 내려갔으니까. 그런데 글을 올리고 며칠 뒤, 지하철에 앉아 있는데 문득 이런 감각이 왔다. 내릴 역이 가까워졌을 때 내가 일어선 것은, '내려야 한다'고 판단해서였을까, 아니면 옆 사람이 일어서는 타이밍에 반사적으로 따라 일어선 것이었을까.
아주 사소한 일인데, 이 질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내 기억, 내 어휘, 내 취향, 내 정치적 의견, 내 감정. 그 앞에 붙어 있던 '내'라는 소유격이 갑자기 느슨해졌다. '내 생각'이 외부의 조합이라는 사실을 머리로 인정한 것과, 그걸 지하철 의자 위에서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앉아 있는 쪽이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 일종의 실존적 현기증이었다.
현기증이 오래 가면 방향을 다시 잡기 어렵다. 1편에서 나는 '내 생각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만 집중했다. 받아들이는 것까지는 지적인 작업이다. 그 이후를 어떻게 살 것인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외부에서 온 재료로 빚어진 존재가, 자기를 '나'라고 계속 부를 수 있는가. 부를 수 있다면 어떤 자격으로. 이 질문이 해결되지 않으면 나는 다음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감각을 오래 미뤄두기 어려워, 나는 철학자 셋을 차례로 소환하기로 했다.
먼저 플라톤. 그가 남긴 유명한 동굴 이야기는, 조금 비틀어 읽으면 뜻밖의 위로가 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벽에 비친 그림자를 세상이라고 믿으며 산다. 그런데 그림자가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상상할 수 있다'는 것 — 그 상상이 이미 첫 번째 자유다. 그림자가 전부라고 믿는 자에게는 탈출의 동기조차 생기지 않는다. 내가 지금 그림자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동굴 벽에 난 작은 균열 같은 것이다.
칸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동굴 밖으로 나가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눈을 가지고 있고, 시간과 공간이라는 기본 안경을 끼고서만 세상을 볼 수 있다. 세상 그 자체 — 칸트는 이것을 '물자체(物自體)'라고 불렀다 — 는 우리에게 영원히 닫혀 있다.
이 주장을 처음 들으면 지하철의 현기증이 더 심해질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우리 모두가 같은 종류의 안경을 끼고 있다는 말은, 완벽한 객관성을 포기하는 대신 서로 말이 통할 공통 지반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이 두 사람을 다 알면서도 이렇게 선언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내가 어떤 영향과 조건 아래 태어났건, 그 재료로 무엇이 될 것인지를 고르는 행위 — 그 고르는 순간에 나는 비로소 '나'가 된다. 재료가 바깥에서 왔다는 사실이, 그 재료를 다루는 주체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세 사람을 나란히 놓고 보니 내 현기증의 성격이 조금 달라졌다. 처음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것 아닌가"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그럼 나는 어떤 방식으로 있는가"로 이동해 있었다. 물음표의 종류가 바뀐 것만으로도 조금은 숨이 트였다.
나는 이 흐름을 AI에게 정리해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영향은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 영향을 받아들이는 주체는 여전히 있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나다, 라고."
AI의 답은 내가 기대한 것보다 한 꺼풀 더 정밀했다.
"그 구도에는 조심할 지점이 있다. '나는 여전히 나다'라는 선언은 주체가 있느냐 없느냐를 여전히 0 아니면 1로 본다. 주체성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도(degree)의 문제에 더 가깝다. 피곤할 때와 또렷할 때, 혼자일 때와 군중 속일 때, 익숙한 언어로 말할 때와 낯선 언어로 말할 때 — 당신의 주체성은 매번 다른 값을 가진다."
답이 명쾌하지 않아서 오히려 믿음직했다. 주체성이 '있다/없다'의 이진법이 아니라, 눈금이 달린 다이얼처럼 움직인다는 그림. 이런 그림이라면 나는 그 다이얼을 올리거나 내리는 쪽으로 내 힘을 쓸 수 있다.
'진짜 나를 되찾는다' 같은 거창한 미션 대신, '오늘 이 장면에서 주체성을 한 눈금 올려본다' 정도의 작은 조정이 가능해진다. 피곤한 날에 SNS를 내려놓는 것. 누군가의 말에 곧장 동의하기 전에 5초쯤 멈춰보는 것. 내가 지금 쓰고 있는 표현이 어디서 들어왔는지 한 번 더듬어보는 것. 전부 그 다이얼에 손을 대는 일이다.
반대 방향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피곤한 채로 계속 스크롤하는 것, 화가 난 채로 곧바로 글을 올리는 것, 누군가의 강한 어조에 밀려 평소에는 하지 않았을 동의를 해버리는 것 — 이런 순간마다 다이얼은 조용히 내려간다.
주체성은 공짜로 유지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나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다이얼이 서서히 낮은 쪽으로 기울어지는 구조에 가깝다.
거기까지 오고 나서, 나는 현기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그것이 '내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는 공포'에서 '내가 지금 어느 지점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호기심'으로 옮겨졌다는 건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피암시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외부에서 온 재료도 줄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재료를 어떤 비율로 섞을지, 어떤 속도로 받아들일지를 고르는 손은 여전히 내 쪽에 있다. 완전히 내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내 쪽'에 있다.
그래서 오늘의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당신의 주체성은 몇 퍼센트쯤에 있다고 느끼는가.
그리고 방금 당신이 그 숫자를 고른 것은, 얼마만큼 당신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