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프레임 밖에 설 수 있는가?

2026 All-Day-Project (197/365)

byJamin

피암시성에 관한 글 에 이어서 고민

피암시성 1: 네가 지금 읽고 있는 이 문장도, 암시일까?

피암시성 2: 외부의 것을 받아들인 나도, 나인가?

피암시성 3: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아니면 유용한 착각인가?


여기까지 오면, 남은 그림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1편에서 우리는 '내 생각'이 외부에서 들어온 재료들로 상당 부분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2편에서는 그럼에도 그 재료를 다루는 주체는 있다는 점, 다만 그 주체성이 '있다/없다'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라는 점을 확인했다. 3편에서 자유의지는 '있다'도 '없다'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어정쩡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문득 이런 의심이 든다. 우리는 혹시, 누군가 이미 짜둔 프레임 위에서 말과 생각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피암시성이 재료를 오염시키고 자유의지가 불확실하다면, 남은 질문은 애초에 우리가 사용하는 '사고의 문법' 자체가 어디서 온 것인가 하는 문제다.


가장 오래된 프레임 후보는 언어다.


20세기 언어학에서 한때 크게 유행했던 '강한 사피어-워프 가설' —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주장 — 은 지금은 거의 폐기되었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는 반례가 너무 많았다. 다만 이 가설의 약한 버전 — 언어가 사고의 습관적 경로에 영향을 미친다 — 은 오히려 다양한 실험에서 살아남았다. 말을 바꾼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말을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은 어느 정도 달라진다는 쪽이다.

약한 버전의 증거로 세 가지 장면이 자주 함께 거론된다.


첫 번째 장면은 나미비아의 힘바족이다. 그들은 파랑과 초록을 같은 단어로 부른다. 그래서인지 영어 화자라면 금방 골라낼 '파란색과 초록색 중 다른 하나'를 고르는 과제에서, 힘바족 참여자들의 반응 시간이 더 느리고 오류가 더 많았다. 흔히 인용되는 "힘바족은 파란색을 못 본다"는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보긴 본다. 다만 인지 속도가 다르다. 그리고 반대 방향도 있다. 힘바어에서는 초록색을 훨씬 세밀하게 나누는데, 이 미묘한 초록 변이는 오히려 영어 화자보다 힘바족이 더 빠르게 집어낸다. 언어에 이름이 있으면 빠르게 보이고, 없으면 느리게 보인다. 그 정도의 이야기다.


두 번째 장면은 호주 원주민 구구 이미티르어다. 이 언어에는 '왼쪽'이나 '오른쪽'이 없다. 대신 동서남북만 있다. 식탁에서 소금을 건네달라는 말을 할 때도 "네 북쪽에 있는 소금을 줘"라고 한다. 이 언어를 제대로 쓰려면 화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 결과 이 언어 공동체의 사람들은 방향 감각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실내에서도, 숲 속에서도, 낯선 도시의 지하 식당에서도, 동쪽이 어느 쪽인지를 거의 틀리지 않는다.


세 번째 장면은 안데스의 아이마라어다. 여기서는 미래가 등 뒤에 있고 과거가 눈앞에 있다. '작년'을 가리키는 말은 '앞 해'이고, '내년'은 '뒤 해'다. 알려진 것은 볼 수 있으니 앞에, 모르는 것은 볼 수 없으니 뒤에. 이 감각은 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아이마라어 화자는 과거를 이야기할 때 손을 앞으로 뻗고, 미래를 이야기할 때 손을 뒤로 가리킨다. 같은 시간을, 다른 방향에 배치하며 산다.


세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약한 사피어-워프의 윤곽이 꽤 분명해진다. 색, 방향, 시간 — 우리가 '당연히 그런 것'으로 여기던 기본 단위들이, 언어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당연함의 상당 부분이 언어에서 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프레임은 정말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한 가지 단서가 이중언어자에게서 나온다.


2017년 Bylund와 Athanasopoulos의 실험이 흥미롭다. 스웨덴어와 스페인어를 모두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웨덴어에서는 시간을 주로 '거리'로 표현한다(긴 시간, 짧은 시간). 스페인어에서는 시간을 주로 '양'으로 표현한다(많은 시간, 적은 시간). 같은 사람에게 스웨덴어 단서를 주고 시간 길이를 판단하게 하면 그는 거리 감각으로 답하고, 바로 이어 스페인어 단서를 주면 양 감각으로 답한다. 같은 사람 안에서, 언어만 바꾸면 시간을 다루는 모드가 바뀐다.


이 발견을 두고 연구자 본인이 대중 기고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뇌가 재배선된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는 엄밀한 의미의 과학적 주장이라기보다 은유에 가깝다. 더 정확한 그림은 이렇다. 프레임은 여전히 있다. 다만 그 사람 안에 프레임이 여러 개 있고, 상황에 따라 모드가 전환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AI에게 풀어놓으면서, 조금 들뜬 결론을 꺼냈다.


"그러니까 이런 거네. 우리는 반드시 어떤 언어로 말해야 한다. 프레임을 완전히 벗을 수는 없다. 그런데 여러 언어를 배우면, 적어도 '언어라는 프레임 자체'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AI가 거기에 한 층을 더 얹었다.


"프레임 밖으로 나가는 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프레임의 가장자리를 느끼고, 여러 프레임 사이를 이동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이 메타인지다. 완전한 탈출이 아니라, 부분적 이동. 이 정도만 해도 주체성의 다이얼은 꽤 많이 움직인다."


나는 여기서 작은 안도를 느꼈다.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저항이 시작된다는 그림. 내가 지금 어떤 언어로, 어떤 은유로, 어떤 시간 감각으로 사고하고 있는지 한 번 돌아보는 것. 그 돌아봄은 프레임의 바깥이 아니라 프레임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래도 가장자리는 한복판보다 확실히 덜 답답한 자리다.


그래서 오늘의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이 지금 세상을 보고 있는 프레임은, 당신이 고른 것인가.

한 번도 다른 프레임으로 바꿔 본 적 없는 장면은, 당신의 일상 중 어느 쪽에 가장 많이 쌓여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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