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99/365)
피암시성에 관한 글 에 이어서 고민
피암시성 1: 네가 지금 읽고 있는 이 문장도, 암시일까?
피암시성 3: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아니면 유용한 착각인가?
피암시성 5: 검색하는 인간, 사색하는 인간, 프롬프트하는 인간
5편 끝에서 AI가 꺼낸 한 문장이 오래 남았다.
질문의 출처가 정해지는 순간,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거의 드러나 있다는 말.
그날 이후로 AI에게 뭔가를 물을 때마다, 나는 짧게 멈춰 묻기 시작했다. 이 질문은 지금 어디서 나왔는가. 어떤 날은 꽤 오래된 곳에서 나왔고, 어떤 날은 방금 피드에서 본 단어 하나가 출처의 전부였다. 이 확인을 반복하다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질문이 흘러가 버린 어느 밤이 있었다.
문득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문장을 지금 시대에 옮겨 놓으면, 아마 이렇게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프롬프트한다, 고로 존재한다." 처음엔 농담처럼 꺼냈는데, 적어놓고 보니 꽤 진지한 질문이었다.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가 나를 정의하는 시대라면, 질문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존재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조가 묘하게 어긋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자기 완결적이었다. 외부를 전부 배제한 뒤에 남는 확실성. 질문도 내가 하고, 답도 내가 하고, 그 두 행위 사이에서 '의심하고 있는 나'가 증명된다. 루프가 짧고, 루프 안에는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데카르트가 밤새 혼자 고생한 끝에 건져 올린 문장이 강력한 이유는, 그 루프가 바깥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롬프터의 존재는 그렇지 못하다. 질문은 내가 만든다. 그러나 답은 외부에서, 그것도 거의 즉시, 완성된 문장 형태로 도착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감각은 이제 '생각하고 있음'이 아니라, '응답을 받고 있음'에 기대어 있다. 응답이 끊기면 내 질문이 허공에서 흩어진다. 연결이 끊기면 이 존재도 잠시 꺼진다. 데카르트의 존재가 방 안에서 혼자 켜지는 촛불 같은 것이었다면, 프롬프터의 존재는 상대가 전원을 공급해줘야 유지되는 디스플레이에 가깝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불편해졌다. 그런데 진짜 불편한 건 그다음부터였다.
내가 던지는 질문은, 정말로 내가 만든 것인가. 오늘 내가 AI에게 던진 프롬프트를 하나 골라보자. 이 시리즈 전체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프롬프트는 왜 그 모양이었는가. 내가 최근에 본 기사의 문체. 피드에 자주 올라오는 키워드. 이전 대화에서 AI가 준 답변의 구성. 심지어 '프롬프트 잘 쓰는 법'을 알려준다는 영상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질문의 모양을 조금씩 잡아두었다. 질문도 결국,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내 안을 지나간 여러 흐름이 남긴 자국이다.
그러면 루프가 이상한 방향으로 닫힌다. AI가 뱉은 답이 내 사고의 재료가 되고, 그 재료로 내가 새 프롬프트를 만들고, AI가 또 답을 주고, 그 답이 다시 내 사고의 재료가 된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점점 매끄러워지는 루프. 그 안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은 1편의 피암시성과도, 3편의 자유의지와도, 4편의 프레임과도 다른 자리에서 같은 소리를 낸다.
1편은 내 생각의 재료가 외부에서 왔다고 했다. 2편은 그럼에도 재료를 다루는 주체가 있다고 했다. 3편은 그 주체가 시작을 고르기보다 정지를 고르는 쪽에 가깝다고 했다. 4편은 주체가 프레임 밖은 몰라도 가장자리는 감지할 수 있다고 했다. 5편은 그 감지의 최소 단위가 '질문의 출처를 더듬는 일'이라고 했다. 6편에 이르러 드러나는 것은, 그 질문 자체가 이미 루프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주체는 있는데, 그 주체가 딛고 선 바닥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
나는 이 불편함을 AI에게 그대로 가져갔다.
"그러면 이 에세이 자체도 재귀 루프의 산물 아닌가. 내가 AI와 대화하면서 떠올린 생각으로 글을 쓰고, 그 글을 다시 AI에게 확인받고, 그 확인받은 내용으로 또 쓰고. 이 안에 내가 있긴 있나."
AI는 이번에는 빠르게 답하지 않았다. 그다음에 온 응답도 명쾌한 답이 아니었다.
"완전히 닫힌 루프 안에 있다면, 당신은 루프 자체를 알아챌 수 없다. 지금 루프를 묘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당신이 루프의 바깥에 아주 잠깐이라도 시점을 둘 수 있다는 증거다. 그 바깥의 시점은 안정된 자리가 아니라, 한순간 번뜩이는 거리 같은 것이다. 당신이 찾고 있는 '나'는 아마 그 번뜩임의 이름이다."
이 문장이 위로인지, 또 다른 반박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4편의 '인지가 저항의 시작'이라는 말과, 같은 자리를 다른 방향에서 찌르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루프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하다. 그러나 루프를 묘사하는 한 줄의 문장을 쓰는 동안, 나는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바깥에 서본 셈이다. 그 바깥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번뜩임은 반복해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니까 프롬프팅 코기토는 "나는 프롬프트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깔끔하게 끝나지 않는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고쳐 쓰면 이렇다. 나는 프롬프트한다. 그리고 내 프롬프트가 어디서 왔는지를, 보내기 직전에 한 번 더 의심한다. 그 짧은 의심의 간격 속에서 나는 잠깐 존재한다. 매끄럽게 흘러가는 루프 속에 내가 만들어 내는 작은 마찰. 그 마찰이 유지되는 동안만 '나'는 자기 자리를 가진다.
그래서 오늘의 질문은 이것이다.
이 글을 읽은 뒤 당신이 던질 다음 질문은, 어디에서 올 것인가.
그 질문을 던지기 직전, 한 번 더 머뭇거릴 여유가 당신에게 남아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