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안녕하십니까

2026 All-Day-Project (202/365)

byJamin

안녕할 것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 을 한 번 더 고쳐 쓰다.



2013년 겨울, 대학가와 슬롯를 뒤흔들었던 한 장의 대자보는 "안녕하십니까"라는 지극히 평범한 인사말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질문은 진짜 안부를 묻는 청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안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당신도 동의하지 않습니까?"라며 이미 답을 정해둔 채 던진 단호한 확인의 외침이었다. '답정너'와 다름없는 이 강요된 질문에 수많은 이들이 격렬하게 호응하며 광장으로 몰려들었던 이유는 명확했다. 그 외침 속에서 사람들은 "나만 혼자 이렇게 아프고 불안한 게 아니구나"라는 연대의 안도감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졌다. 이제 "안녕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아니오, 안녕하지 못합니다"라고 답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진부한 상식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질문에 파격적인 울림이나 진짜 해결바카라을 기대하지 않는다. 슬롯가 그때보다 본질적으로 더 나빠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질문 자체가 가진 힘과 신뢰를 우리가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물어도 바뀌지 않는 현실 앞에서, 안부를 묻는 행위는 무력한 관용구로 전락했다.


그 무력감의 배후에는 거대한 '시스템'이 존재한다. 정부, 기업, 법률 체계 같은 것들은 본래 물리적 실체가 없다. 인간이 필요에 의해 고안해 낸 개념적 약속일 뿐이다. 그러나 이 가상의 존재들은 우리 개개인의 삶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며, 때로는 바위보다 무겁게 우리를 짓누른다. 비극적인 것은 우리가 생명을 불어넣은 시스템이 이제는 거꾸로 우리를 삼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비극을 겪고도, 또다시 이태원 참사라는 참담한 슬픔을 마주하고도 우리 슬롯가 작동하는 방식은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우리는 매번 "누구의 바카라임인가"를 거칠게 묻고, 성난 여론을 잠재울 희생양을 찾아 단상 위에 올린다. 어느 한 사람이나 기관을 파면하고 처벌하는 것으로 면죄부를 얻은 시스템은, 정작 알맹이인 구조적 모순을 그대로 둔 채 다시 가동된다.


이러한 반복은 특정 개인의 악의 때문이 아니다. 시스템은 애초에 도덕성을 지닌 인격체가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항상성과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거대한 기계이자 생물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고장 났기 때문에 우리를 집어삼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스템이 '너무나 정상적으로,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를 집어삼키는 것이다.


이영도 작가의 소설 《피를 마시는 새》에는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게 통제하느라 정작 아무도 곁에 오지 못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지만 가장 치명적인 외로움에 갇히는 새의 우화가 나온다. 거대한 권력이자 질서인 시스템의 속성이 이와 같다.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내부를 감시하고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하는 메커니즘. 이것은 당위나 윤리의 영역이 아닌 비정한 물리 법칙에 가깝다. 모든 자원이 완벽하게 분배될 수 없고, 권력자의 탐욕이 실존하며, 인간의 계산과 통제에 한해(限海)가 명확한 한, 시스템 유지를 위한 누군가의 희생은 슬프게도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이미 국가나 슬롯의 시스템을 무조건 신뢰하지 않기로 엄연한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시스템을 거부한 채 각자도생하기에 '나'라는 개인의 힘은 너무나 무력하다. 모든 구속을 거부하는 아나키스트가 되거나 문명을 등진 자연인으로 회귀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생존을 위해 또 다른 형태의 작은 시스템을 구성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선택지는 "내가 손을 뻗어 도움을 청하면, 적어도 내 주변은 반응할 것"이라는 연대의 믿음뿐이다. 마이클 잭슨이 노래한 'Man in the Mirror(거울 속의 사람)'가 거울 속의 '나'라는 개인의 각성과 변화에 집중했다면, 이제 우리는 그 변화의 반지름을 '내 주위'로 확장해야 한다. 1인칭 단수의 삶에서 1인칭 복수의 삶으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다.


시스템이 비대해지고 정교해질수록 그 안에서 내려지는 명령과 구제 체계는 추상화되고 지연된다. 관료제의 절차를 거치는 동안 현장의 비극은 서류 위의 숫자가 된다. 하지만 '주변'은 다르다. 내 옆자리의 동료, 매일 메시지를 주고받는 단체 대화방의 친구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은 시스템보다 훨씬 빠르고 생생하게 내 고통에 반응한다.


지진 소식을 듣고 멀리 계신 부모님께 드릴 보조배터리를 다급하게 결제하던 순간, 카지노톡으로 서로의 안전을 다급하게 묻던 그 찰나의 순간에, 우리는 이미 정부의 거창한 '재난 대응 매뉴얼'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시스템의 자가포식을 당장 멈출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시스템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속도보다 내 주변을 돌보고 구하는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드는 것뿐이다.


희생이 인류 슬롯의 필연적인 지형이라면, 우리가 개입해야 할 곳은 '누가, 어떻게 희생되는가'를 결정하는 설계도의 균열이다. 시스템이 자원을 완벽하게 분배하지 못하는 것은 기술적 한계일지 몰라도, 그 공백의 대가가 언제나 슬롯적 약자와 소외 계층에게만 쏠리는 패턴은 결코 자연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위정자들의 무능과 무바카라임, 그리고 구조적인 무관심이 빚어낸 인공적인 절벽이다.


우리가 곁에 있는 '주변'을 돌보는 행위는, 거대 시스템을 당장 무너뜨리거나 완전히 대체하겠다는 거창한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이 뿜어내는 비정한 충격이 우리 삶에 그대로 격돌하지 않도록 스스로 '완충재'가 되어주는 일이다. 시스템은 우리를 이름 없는 익명의 희생자나 통계학적인 숫자로 취급하지만, 주변의 이웃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나를 구체적인 존재로 붙잡아준다. 시스템은 비극을 차가운 데이터로 처리하지만, 주변은 그것을 살을 도려내는 듯한 '상실'로 경험하고 끝까지 기억한다.


우리의 '주변'은 거대 시스템의 빈틈 사이사이에 푸른 생명력을 심는 완충지대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의 틈새를 뚫고 끈질기게 자라나는 잡초처럼, 시스템이 효율과 성장의 직선만을 고집하며 질주할 때 우리의 주변은 연대와 돌봄이라는 잊혀진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내는 소중한 실험실이 된다.


나는 정치가 보여주는 위선과 위기 상황마다 반복되는 위정자들의 무능한 대처에 깊이 환멸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과오를 비난하고 폭로하는 일에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싶지 않다. 내게 정말로 중요하고 관심이 있는 것은 권력자들의 말잔치가 아니라, 이 무거운 시대를 함께 견뎌내고 있는 보통 사람들, 바로 당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쉽게 냉소주의로 숨어버리는 대신 기꺼이 분노하길(Keep Angry) 원했다. 구조를 바꾸고 싶어 했던 그 착하고 순수한 마음들이, 거듭되는 실망감에 지쳐 차가운 포기로 이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평소에는 침묵하다가 거대한 슬픔과 참사가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처음에는 깊은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에 대한 나의 짧고 오만한 생각이었음을 인정한다. 일상에 치여 각자도생하던 보통의 존재들이 타인의 아픔을 제 일처럼 여겨 뒤늦게나마 목소리를 보태는 것, 그 부끄러움을 무릅쓴 동참이야말로 시스템이 미처 통제하지 못한 인간 내면의 '선한 탄성'이 살아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시스템의 선의를 믿지 않는다. 권력자의 욕심이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질 거라 기대하지도 않으며, 세상에 완벽한 계산과 정의로운 분배가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도 버렸다.


그럼에도 우리가 끝내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지금 눈을 맞추고 마주한 이 사람은, 거대 시스템이 다음번 희생양으로 지목하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뻗어 붙잡을 가치가 있는 귀한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작은 붙잡음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하게 얽힐 때, 시스템의 정교한 컴퓨터가 결코 계산해내지 못하는 인간만의 '잉여의 가치', 즉 사랑과 연대가 탄생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 속의 영웅들은 대개 차가운 시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영웅들을 지켜내야 하며, 그들과 끝까지 살아가기 위해서 무너진 신뢰를 바닥에서부터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냉소를 거두고 누군가가 먼저 남을 조건 없이 믿어주어야만 한다. 그 무모하고도 위대한 첫걸음을 과연 누가 시작해야 할까. 바로 지금 여기 있는 우리 모두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의 귓가에 속삭여야 한다. 당신 스스로를 믿으라고, 우리가 가진 그 선한 마음을 포기하지 말고 살아가자고, 그리고 내가 기꺼이 너를 믿어주겠노라고.


시스템은 내일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눈을 부릅뜰 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거친 풍랑 속에 남겨진 듯 불안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무너지려 할 때, 내 주변의 누군가는 내가 차가운 통계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줄 것이다. 그 따뜻한 부름이 있다는 것, 오직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오늘을 기어이 버텨내고 내일로 걸어 나갈 눈부신 이유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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