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의 온역(溫域)

by선비천사

손바닥을 펼치면 손금 사이로 오랫동안 스며 있던 먹물 자국 대신, 지문 골마다 깊게 파인 주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평생 붓 끝을 다듬고 곧은 획을 그으며 살아온 손가락이었다. 종이 위에서는 흐트러진 획 하나도 용납하지 못하는 엄격함이 있었지만, 바카라상 밖의 세상에서는 머릿속의 분명한 잣대가 좀처럼 그대로 들어맞지 않았다. 정답이 선명하던 벼루 앞과 달리, 현실에서 옳은 말 한마디를 뱉는 일은 종종 누군가의 살을 베는 가시가 되곤 했다.


어두워지는 저녁, 주방 식탁 위에 대파 몇 뿌리를 놓아두고 칼끝을 멈춘다. 아침 일찍 마트에서 사 온 동태 한 마리가 도마 위에서 차갑게 누워 있다. 손끝에 기름이 묻고 생선 비린내가 스미는 일은 여전히 거북하다. 하지만 퇴근길의 고단함을 짊어지고 문을 열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발걸음은 자연스레 불 앞으로 향한다.


파를 썰고 육수를 우려내는 한 시간 남짓. 도마 위에 달깍거리는 칼소리가 퍼질 때쯤이면 집 안의 차가운 공기는 조용히 덥혀지기 시작한다. 남에게 상처 줄까 봐 숱한 말을 목구멍 안으로 삼킨 하루였지만, 냄비 속에서 보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국물 소리를 들으면 내 안에 엉겨 있던 것들마저 가만히 풀어지는 듯하다. 손가락 끝에 밴 생선 냄새는, 사랑하는 이들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내가 치른 가장 다정한 훈장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때로 나를 두고 "마음이 여려 큰일은 못 할 사람"이라며 혀를 차곤 했다. 내면에 옳고 그름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건 틀렸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상대의 눈동자에 스칠 서러움과, 뒤이어 찾아올 냉랭한 정적이 두려워 한발 물러섰을 뿐이다. 비난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저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찻잔만 만작거렸다.


그럴 때면 나는 집 근처 산 자락의 조용한 오솔길을 찾는다. 해 질 녘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음영을 따라 걷다 보면 움츠렸던 마음이 제자리를 찾곤 했다. 산길을 내려오다 길가 중고 서점 앞을 지날 때면, 매대에서 몇 번이고 만지작거리다 끝내 내려놓았던 시집 한 권이 눈에 밟힌다. 정작 자신을 위해 주머니를 터는 일에는 주저하면서도, 지인의 경사나 고단한 이의 소식에는 주저 없이 봉투를 건네고 돌아서는 내 미련함에 나지막이 한숨을 쉬기도 했다.


하지만 찌개 김이 피어오르는 식탁 둘레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따뜻한 밥 한 술을 뜨는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오래도록 부끄러워했던 마음속에는 두려움만 있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마주 선 사람의 마음을 차마 꺾지 못해 삼킨 말도 있었고, 옳다는 이유만으로 밀어붙일 수 없는 순간도 있었다. 그 마음으로 나는 평생 자주 물러섰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렇게 물러선 자리에는 늘 다른 사람의 마음이 머물 틈이 남아 있었다. 평생 붓을 쥐고 곧은 획을 그으려 애썼으나, 저녁이면 냄비 앞에서 부드럽게 구부러지던 그 서툰 손길들이 이 조그만 집안의 온역(溫域)을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혼자 걷는 길을 좋아하고, 사람들 앞에 서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어색해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흔들 만한 큰 목소리도, 남을 넘어서는 배짱도 없다. 하지만 끓는 냄비 앞을 가만히 지키고 서 있는 나의 등 뒤로, 저물어가는 저녁 빛이 따뜻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온 세상이 차가워져도 내 사람들의 식탁만큼은 끊이지 않고 따스할 것이라는 조용한 확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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