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궤적

by선비천사

입추가 지났는데도 아침 공기는 여전히 묵직하다. 창문을 열자 스치는 바람 한 줄기가 피부에 스민다. 문득 제주에서 보았던 돌담이 떠올랐다. 돌과 돌 사이가 숭숭 비어 있는 제주 돌담은 제주의 거센 바람을 마주하고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힘으로 막아서는 대신, 그 구멍 사이로 바람을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억지로 싸우지 않고 바람과 더불어 서 있는 법을 제주 사람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주에 머물던 시절, 내 우산은 바람에 번번이 뒤집히곤 했다. 얼굴이 얼얼할 정도로 매서운 해풍을 피해 돌담 구석에 바짝 붙어 섰을 때, 담장 사이 작은 틈으로 스며 나오던 바람은 신기하게도 순하고 아늑했다. 거센 바람도 돌담의 틈을 지나고 나면 한결 부드러워졌다.


삶에도 각기 다른 모양의 바람이 불어온다. 어떤 바람은 보이지 않는 상처를 남기고 간다. 오래전 이웃에 살던 한 여인은 남편의 바람으로 오랜 시간 속을 끓였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라 믿고 싶었으나, 한 번 흔들린 마음의 기둥은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도 흔들림은 오래도록 가라앉지 않았고, 그녀의 마음도 바람 든 무처럼 속으로 푸석해져 갔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떤 바람은 막아내려 애쓸수록 더 거세게 가슴을 파고들었고, 그럴 때마다 마음의 문을 더욱 굳게 걸어 잠갔다. 상처받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수록 마음의 빈자리는 넓어져 갔다.


내 삶에도 무수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떤 바람에는 휘청였고, 어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래도록 쓸쓸함이 남았다. 이제는 안다. 모든 바람을 막아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제주 돌담처럼 마음 한구석에 작은 틈을 내어, 지나갈 것은 지나가게 두어도 된다는 것을.


창문을 연다. 아침 공기를 싣고 온 바람이 볼을 스친다. 한때는 두려웠고 때로는 아팠던 바람인데, 오늘의 바람은 그저 반갑다. 지나온 바람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궤적을 그으며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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