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의 집, 손가락의 길

by선비천사

새벽 세 시, 베란다 문을 조금 열면 소래산 자락에서 내려온 차가운 밤공기가 서재 구석까지 들어온다. 불 꺼진 아파트 거실,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빛만이 내 여윈 손등을 비추고 있다. 마우스를 딸깍일 때마다 화면 위에는 지나온 삶의 파편들이 먼지처럼 떠다닌다. 여전히 내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과 잡념으로 야단법석이다.


어릴 적의 나는 머릿속에 너무 많은 집을 짓는 아이였다. 시골 마당 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볼 때면, 별 하나에서 시작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밤을 꼬박 새우곤 했다. 집 근처 산자락을 홀로 오르내리며 보낸 지난 세월 동안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발아래 흙길을 밟으며 세상의 이치와 삶의 가치를 끊임없이 되짚었지만, 산을 내려와 먼지를 털어내고 나면 머릿속을 스쳐 간 수많은 깨달음은 산바람에 날리는 흙먼지처럼 공중으로 사라져 버리곤 했다. 생각과 혼잣말은 그 자체로 아무런 물리적 무게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 행동의 첫발을 떼지 못하는 삶. 그것은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닌 조용한 형벌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수십 권의 바카라을 지었고 수만 리 길을 걸었지만, 정작 신발 끈을 매고 문밖을 나서지 않으면 세상은 단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생각은 손발을 통과하지 않으면 머릿속에서 피었다 지는 환영에 불과했다. 생각과 행동 사이의 깊은 간극, 나는 늘 그 경계선에서 머뭇거리던 사람이었다.


최근 인공지능과 로봇에 관한 소식을 접하며 문득 서늘한 소름이 돋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생각이 명령이 되고, 명령이 곧 움직임이 되는 로봇의 육체. 그 철의 몸 앞에서, 평생 생각의 과잉과 행동의 지체 속에서 비틀거려 온 나는 묘한 자괴감과 마주해야 했다. 로봇에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마찰력 제로의 회로를 흐르는 전류에 불과하지만, 인간인 나에게 그것은 매 순간 거대한 돌덩이를 밀어 올려야 하는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보드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깨닫는다. 생각을 행동으로 바꾸는 일, 내가 평생에 걸쳐 터득한 가장 확실한 움직임은 바로 '글을 쓰는 행위'였다.


머릿속을 맴도는 모호한 감상과 스쳐 지나가는 글감들은 그대로 두면 한낱 흩어지는 잡념에 불과하다. 하지만 바카라상 앞에 앉아 판판한 자판 위에 손가락을 얹고 자음과 모음을 눌러 담는 순간, 그 잡념은 비로소 세상에 실존하는 문장이 된다. 세상에는 자신이 쓴 글을 들고나가 바카라을 엮고 강연장에 서는 거대한 행동가들도 있다. 그들에 비하면 아파트 방 한구석에서 홀로 자판을 두드리는 나의 행위는 소소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이 머리에 머물지 않고, 손가락의 마찰과 자판의 울림이라는 물리적 진동을 거쳐 화면 위에 단단한 궤적을 남기는 이 짧은 과정이야말로 내가 세상과 맞닿는 가장 진실한 순간이다. 로봇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단 한 줄의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밤새 머리를 쥐어뜯는 그 지독한 망설임을, 수많은 잡념 중에서 단 하나의 단어를 골라내기 위해 가슴을 졸이는 그 머뭇거림을 말이다.


망설임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숭고한 마찰력이다.


오늘도 머릿속엔 구름처럼 많은 집들이 피어오르고 지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상상의 안갯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조용히 자판 위에 열 손가락을 올린다.


딸깍, 딸깍.


적막을 깨는 소리와 함께 모니터 위에 까만 단어들이 툭툭 떨어져 내린다. 생각이라는 형태 없는 바람이 손가락을 지나 한 글자씩 자리를 잡는다.


평생 머릿속에 수많은 집을 짓고 허물었다. 이제야 안다. 집은 생각으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한 글자씩 쌓아 올려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다음 글자를 누른다.


딸깍.


오늘 내가 생각에서 행동으로 건너간 거리는, 어쩌면 손가락 하나의 길이만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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