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모든 것이 넘실거리는 만조의 바다 같다. 손을 뻗으면 무엇이든 쥘 수 있을 것만 같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늑한 온기를 품고 있다. 그러나 차오른 물은 반드시 빠지기 마련이며, 밀려왔던 행운의 잔해들은 순식간에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춘다. 우리는 대개 그 변화를 미리 감지하지 못한다. 영원할 것 같았던 일상의 평온함에 균열이 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이 우리를 향해 거대한 파도를 몰고 오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 지독한 썰물의 계절은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의 일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이 흘렀건만, 그해 겨울의 스산한 공기와 텅 빈 방안을 구르던 서늘한 적막은 여전히 살갗에 선명하다. 처음에는 사소한 어긋남이었다. 계획했던 일들이 조금씩 틀어지고, 믿었던 관계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시련은 결코 홀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오래된 격언처럼 경제적인 궁핍, 건강의 적신호, 가장 가까운 이들의 외면이 차례차례 겹쳐왔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을 내밀어 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지독한 고독감이 목을 죄어왔다.
내일이라는 단어에서 희망이라는 온기가 완전히 증발해 버린 날들이 지속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형벌처럼 느껴졌다. 되는 일은 단 하나도 없었고, 세상은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만 다정하게 굴러가는 것 같았다. 그 겨울,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창밖만 바라보다가 해가 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어둠이 방 안을 집어삼킬 때까지 불도 켜지 못했다. 무력감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치열하게 버티는 것이었다.
파도가 거세게 몰아칠 때는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사방에서 들이치는 바닷물을 삼키며 그저 가라앉지 않기 위해 허우적거릴 뿐이다. 하지만 진짜 고통은 파도가 완전히 물러간 뒤, 매서운 바람만이 감도는 고요 속에서 찾아온다. 물이 빠져나간 자리는 황량하다. 화려하게 표면을 덮고 있던 거품과 물결이 사라지자, 그동안 감춰져 있던 앙상한 바닥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울퉁불퉁하고 이끼 낀 바위, 깨진 조개껍데기, 누군가 버리고 간 오물들. 그것이 바로 꾸밈없는 내 삶의 진짜 민낯이었다. 화려한 수식어도, 나를 보호해 주던 그 어떤 가림막도 없이 온전히 홀로 서 있어야 하는 절대적인 고독의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그 바닥을 마주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내가 이토록 나약하고 가진 것 없는 존재였나 싶어 스스로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그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묘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바닥을 쳤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거친 파도에 휩쓸려 다닐 때는 어디로 휩쓸려 갈지 몰라 두려웠지만, 단단한 바닥에 발을 딛고 서자 비로소 내가 서 있는 좌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희망은 사라졌지만 삶은 끝나지 않았다. 온몸으로 파도를 맞고 이제 썰물이 되어 바닥이 드러나는 이 시기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다. 화려한 거품에 가려 보이지 않던 내 내면의 진실을 대면하는 시간, 그리고 오직 내 다리의 힘만으로 서 있어야 하는 자립의 시간이 바로 그 20년 전의 겨울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버틴다는 말을 수동적이고 패배주의적인 뉘앙스로 사용하곤 한다. 이렇다 할 해결바카라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시간을 견뎌내는 나약한 행위로 치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독한 썰물의 계절을 통과하며 깨닫게 되었다. 버티는 것은 결코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었다. 그 모진 세월을 버티는 동안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오늘 하루를 살아내고, 거친 밥을 삼키는 일. 외적으로는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적으로는 삶의 지반을 다지는 가장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법이다.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하루를 버텨내는 인간의 뒷모습은 그 자체로 묵직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거창한 성공 신화를 쓰거나 위대한 업적을 남겨서가 아니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몫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온몸으로 파도를 맞아가며 하루라는 시간의 벽돌을 쌓아 올리는 태도 때문이다. 그날도 나는 그렇게 하루를 살았다.
썰물은 결국 다시 밀물이 된다. 다시 밀물이 찾아와 내 삶의 황량했던 바닥을 따스하게 채울 때,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파도에 쓸려가지 않기 위해 바닥을 웅크리고 버던 그 기억은, 내 삶의 가장 단단한 주춧돌이 되어 준다. 이제 웬만한 잔파도에는 흔들리지 않는 깊이와 무게감을 지닌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가끔 그 겨울을 떠올린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버틴 하루하루가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도 어딘가에는 세상의 모든 불행을 온몸으로 맞으며 겨우 하루를 버티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그 사람의 실루엣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말을 건네고 싶다.
언젠가 다시 밀물은 찾아온다. 그때까지 우리는 오늘 하루를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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