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쇠를 위한 변명

by선비천사

아내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돈이란 벌어서 멋지게 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 확신 앞에서 나의 오랜 습관은 늘 고리타분한 구두쇠의 집착으로 전락하고 만다. 내가 가계부를 펼치며 무언가를 아끼려 할 때마다 아내는 혀를 찼다. 그렇게 아끼다가 나중에 후회만 남는다고, 결국 그 돈 다 쓰지도 못하고 병원에 가져다줄 거냐고 나를 채근했다.


사실 아내만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 역시 내가 고심 끝에 고른 물건을 보거나, 당연히 지갑을 열어야 할 순간에 멈칫거릴 때면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우리 아버지는 왜 이리 궁색할까’ 하는 안쓰러움과 원망이 섞여 있었다.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은 가족과 함께 상점에 갔을 때다. 진열된 상품의 가격표를 보고 나도 모르게 “아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비싸?” 하고 툭 한마디 던지면, 아내와 아이들은 질겁을 한다. 아이들은 제발 그만하라며 내 소매를 잡아끌고, 아내는 묵묵히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 장소에서 내가 치른 것은 겨우 물건값에 대한 타당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치른 것은 주변의 시선 속에서 겪어야 했던 부끄러움이었을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완고한 노인이 된 것 같은 고독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하지만 이 궁색한 뒷모습 뒤에는 평생을 아끼는 인간으로 살아온 나만의 독백이 숨어 있다. 세상은 흔히 아끼는 자를 인색하다 비난하지만, 쓰고자 하는 사람들의 화려함 뒤에는 통장 잔고가 비어 가는 남모를 불안이 도사리기도 한다. 쓰는 즐거움을 앞세우다 보면, 어느새 모아둔 돈이 부족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변 사람들은 평생 쓰지도 못하고 죽으면 억울하지 않겠냐고 호기롭게 일갈한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나직이 반론을 준비한다. 쓰는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하는, 내 입으로 들어갈 달콤한 과실을 참고 견뎌내는 그 마음을 말이다. 그것은 단순히 돈을 모으는 행위가 아니다. 마침내 가족의 울타리를 단단하게 다져놓았을 때 느껴지는 묵직한 뿌듯함이다. 나의 인내가 누군가의 안정이 될 때, 나는 영혼의 포만감을 느낀다.


물론 돈을 모아둔 사람의 주변은 시끄럽다. 빌려달라는 이, 나누자는 이들의 목소리가 웅성거린다. 반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의 곁은 황량하리만큼 조용하다. 시끄러운 활기 속에 숨은 번잡함과 고요함 속에 숨은 쓸쓸함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인가. 쉽게 답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수중에 돈이 있다는 사실이 삶의 무한한 가능성을 붙잡아두고 있다는 위로를 준다는 점이다.


돈을 쥐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불행으로부터 내 가정을 지켜줄 마지막 방패다. 내가 쓰지 못하고 남긴 돈을 훗날 누군가 쓰게 된다 한들 그것이 왜 억울한 일인가. 남겨놓지 못해 주위를 궁핍하게 만드는 것보다 내가 참아낸 흔적으로 인해 누군가가 뜻밖의 풍요를 누리는 것이 훨씬 낫다. 내가 쓰는 것만 좋은 것이 아니라, 남이 기쁘게 쓰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또한 삶의 또 다른 이타주의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상점 안에서 질겁하던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내 안에서도 서글픈 반성이 고개를 든다. 내가 늘어나는 통장 잔고를 보며 홀로 즐거워하는 동안, 아내와 아이들은 평범한 일상의 풍요를 누릴 기회를 저당 잡혔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의 아낌이 그들에게는 인내의 강요이자 궁색함의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다.


돈을 아끼는 일에만 마음을 쏟느라 정작 곁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인색함이다. 아끼는 행위 자체가 내게는 삶의 방식이자 기쁨이었지만, 그 행복의 테두리 바깥에서 서운함을 견뎌야 했던 가족들의 시선이 오늘따라 아프게 밟힌다.


오늘도 아내는 외출 채비를 하며 저녁을 사 먹자고 한다. 냉장고에 남은 재료로도 충분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이번만큼은 삼키기로 한다.


상점에 들어서자 어김없이 가격표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가격표 앞에서 입을 꾹 다문다. 돈을 아끼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끼는 일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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