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산의 새벽, 먹구름을 안고 걷다

by선비천사

어느 날 문득 삶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예고도 없이, 그러나 아주 서서히 마음의 가장자리부터 검은 먹물이 번져 들었다. 뚜렷한 사고가 있었던 것도, 몸 어디가 찢기거나 부러진 것도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이었기에


그 무게는 오롯이 내가 견뎌야 할 몫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울의 먹구름이 머리 위를 가득 메우자, 세상의 모든 소리와 빛은 거짓말처럼 단절되었다.


그 어둠은 너무나 막막해서 손으로 치울 수도, 발을 굴러 피할 수도 없었다.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면서도 머리 위에는 항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따라왔다. 한 시간의 견딤이 하루처럼 길었고, 그 하루가 모여 내 삶 전체가 어둠 속에 갇혀버릴 것만 같았다. 오죽하면 이 끝없는 굴레를 끊어내는 길은 차라리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것뿐이겠냐는 서글픈 생각이 턱 끝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그날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불을 끈 방 안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는지 모른다. 눈을 감으면 생각은 더욱 또렷해졌고, 눈을 뜨면 희끄무레한 천장만 아득하게 떠 있었다. 새벽이 깊어질수록 방 안의 공기마저 묵직하게 가라앉아 가슴을 짓눌렀다. 더는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귀를 찌르던 새벽 네 시 반, 어디로 가야겠다는 목적도 없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현관 불이 켜지자 오래된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쪼그리고 앉아 운동화 끈을 꽉 동여매는 동안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문을 열고 나서자 축축한 새벽공기가 얼굴에 와닿았다. 집 근처 소래산 자락으로 들어서는 들머리는 낮게 깔린 안개와 습기 머금은 흙냄새로 가득했다. 인적 없는 산길에는 가로등 몇 개가 희미한 주황빛을 내뿜으며 젖은 길목을 겨우 비추고 있었다. 머리 위의 먹구름을 억지로 몰아내려 몸부림치는 대신, 나는 그저 발밑에서 서걱거리는 자갈 소리에 의지해 가파른 오르막을 천천히 올랐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무거워져 길가에 서 있는 참나무 옆에 멈춰 섰다. 밤새 이슬을 머금은 나무껍질의 냉기가 손바닥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을 괴롭히던 무거운 생각들이 멈추었다. 다음 한 걸음을 떼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발바닥으로는 흙과 돌의 단단한 감촉이 똑똑히 전해졌다. 나는 그제야 내가 아직 이 땅을 딛고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소래 자락 너머 마을의 작은 불빛들이 안갯속에서 아득히 반짝이고 있었다.


다시 걸음을 옮길 무렵,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 끝이 아주 조금 옅어져 있었다. 밤이 끝났다고 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적어도 조금 전과 같은 어둠은 아니었다.


산에서 내려왔다고 해서 당장 삶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집 안의 적막이 다시 나를 맞았다. 다음 날에도 마음은 여전히 짓눌렸고,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해지는 순간은 불쑥 찾아왔다. 다만 아주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가슴이 막혀올 때마다 새벽 산길에서 손바닥으로 느꼈던 참나무의 차가운 감촉과 발 밑의 단단한 흙길이 문득문득 떠오른다는 점이었다.


며칠 뒤 조용한 오후였다. 거실 한구석에 가만히 앉아 다기를 꺼내 마른 천으로 찻잔을 닦고 있었다. 매끈하고 서늘한 도자기의 표면이 손가락 끝을 스쳤다. 옆에 놓인 주전자에서는 막 끓기 시작한 물이 낮은 소리를 내며 김을 피워 올렸다. 다기의 온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지던 그 정적인 순간, 가슴 한쪽을 육중하게 누르던 압박감이 조금 가벼워진 듯한 기분이 들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창밖의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시야를 가리던 구름의 틈새가 조금씩 벌어지며, 그 사이로 맑고 푸른 하늘이 조각조각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억지로 밀어내려 할 때는 꼼짝 않던 구름이, 어느새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유리창 너머로 얇고 따스한 햇살 한 줄기가 비스듬히 거실 바닥을 비추었다. 먼지 한 톨이 그 빛 속에서 천천히 헤엄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다정한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깊은숨을 내쉬었다.


먹구름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아마 다시 짙어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안다. 구름이 하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그날 오후, 거실 바닥에 내려앉은 한 줄기 햇살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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