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마루를 타오르듯 채우던 저녁노을이 어둠의 결 속으로 번져간다. 눈이 부시도록 붉게 타오르던 빛깔은 어디론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밤이라는 고요한 그릇 속으로 천천히 스며든다. 바람이 언덕을 타고 올라와 옷깃 사이를 파고든다. 손아귀에 잡히지 않고 사라진 것들은 다 어디로 가서 저토록 그윽한 어둠이 되는 것일까.
오십 년 전, 여름날의 구멍가게 앞이 떠오른다. 학교가 파하면 바카라가방을 둘러멘 채 친구들과 달려가던 곳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짤랑거리던 동전 몇 닢을 모아 손에 쥐었던 브라보콘 하나. 포장지를 벗기는 순간만큼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삼십 도를 넘나드는 무더위 속에서 과자 콘 위의 하얀 크림은 금세 물러졌다. 한 입 베어 물면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기운과 진한 단맛이 혀끝에서 번졌다. 아껴 먹고 싶었지만 여름 햇볕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크림은 과자 틈새로 스며들고 손가락 마디를 따라 흘러내렸다.
“빨리 먹어. 다 녹는다.”
누군가 한마디 하면 우리는 서로의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며 깔깔 웃었다. 녹아내리는 것이 아까워 손가락 끝까지 쪽쪽 빨아먹었다. 바닥에 떨어진 하얀 방울 위로 개미 한 마리가 다가오던 모습까지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때는 몰랐다. 손 안에서 녹아 없어진 것들이 이토록 오래 가슴에 남으리라는 것을.
세월이 흘러 나는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젊음과 서로에 대한 믿음뿐이었던 신혼 시절, 우리는 작은 단칸방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겨울이면 문틈으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왔고, 생활비를 떼고 나면 주머니는 금세 가벼워졌다.
그래도 월급날이면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가 서운했다. 퇴근길 길모퉁이 좌판에서 천 원짜리 귤 한 봉지를 샀다. 찬바람을 뚫고 돌아와 봉지를 내밀면 아내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윗목에 이불을 끌어다 덮고 마주 앉아 귤껍질을 까면, 좁은 방 안 가득 찌르르하게 싱그러운 단내가 퍼졌다. 크고 먹음직한 것은 슬며시 아내 쪽으로 밀어놓고, 아내는 그것을 반으로 갈라 다시 내게 건넸다. 한쪽 두 쪽 나누어 먹다 보면 빈 껍질만 찻상 위에 수북이 쌓였다.
그때의 우리는 가진 것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에게 좋은 것을 한쪽이라도 더 건네려는 마음이 있었고, 추운 방에서 발끝을 맞대고 하루를 이야기할 사람이 있었다. 손가락이 노랗게 물들도록 귤을 나누어 먹던 그 순간은 영원히 굳어 있을 정물(靜物)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시간은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식구가 늘었다. 월급날의 설렘은 생활비를 헤아리는 걱정으로 바뀌었다. 아침이면 서둘러 집을 나섰고 밤이면 지친 몸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어느새 자라 제 길을 찾아 떠났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건너다보니 젊은 날은 언제 지나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삶에서 소중했던 것들은 지나가고 난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저녁 한 끼, 퇴근을 기다리던 얼굴, 아이가 처음 내 손가락을 움켜쥐던 작은 손, 잠든 식구들의 숨소리. 그저 평범한 하루였는데, 지나고 나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표정이 되어 있다.
어느덧 나는 육십 줄의 언덕에 다다랐다. 거울 앞에 서면 서리 내린 머리칼과 깊게 팬 주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오래전 이름들이 불현듯 떠오른다. 함께 웃던 사람 중에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도 있고, 오래 살던 동네의 골목과 자주 가던 가게도 하나둘 모습을 바꾸었다.
예전에는 사라지는 것은 곧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젊음이 지나가는 것도, 아이들이 품을 떠나는 것도 내게서 무언가를 하나씩 가져가는 일인 줄 알았다.
저무는 하늘을 오래 바라보다 문득 생각한다. 눈앞에서 사라진 것들은 정말 모두 소멸해 버린 것일까.
중학생 때 먹었던 브라보콘은 혀끝에서 녹아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라진 것은 아이스크림의 형체뿐이었다. 손가락에 남아 있던 달콤한 감촉, 친구들의 웃음소리, 달아오른 흙길의 여름 냄새와 기울어진 햇빛은 지금도 내 안 어딘가에 숨 쉬고 있다.
신혼 시절 아내와 함께 까먹었던 귤도 마찬가지다. 그 겨울의 귤도, 우리가 살던 단칸방도 이제는 기억 속에만 남았다. 하지만 아내가 말없이 따뜻한 차 한 잔을 내 앞에 밀어놓을 때면, 나는 가끔 그 좁은 방의 온기를 느낀다. 서로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웃을 때면 천 원짜리 귤 한 봉지를 가운데 놓고 앉아 있던 젊은 부부가 잠시 돌아오는 것만 같다.
그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어떤 것들은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모습을 잃은 것들은 한 사람의 말투가 되고, 습관이 되고, 누군가를 바라보는 눈빛이 되어 오래 남는다.
하늘을 물들이던 붉은빛이 이제 어둠 속으로 가만히 섞여 들어간다. 조금 전까지 산등성이를 붉게 태우던 노을은 어느새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그러나 노을이 사라진 자리의 어둠은 이상하리만큼 깊고 따뜻하다. 어쩌면 저 어둠 속에도 방금 전의 붉은빛이 조금은 녹아 있을 것이다.
언덕길 위로 밤의 고요가 낮게 내린다. 차가운 바람에 손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는다. 문득 오십 년 전, 구멍가게 앞에서 손가락 마디로 흘러내리던 아이스크림의 단맛이 혀끝에 사르르 되살아난다.
나는 한동안 그 맛을 가만히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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