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가 떠난 자리

by선비천사

병원 진료실의 조명은 지나치게 밝았다. 차가운 쇠 쟁반 위로 떨어진 것은 단지 오래된 치아 하나가 아니었다. 핏물이 거무스름하게 묻어난 어금니는 길고 깊은 뿌리를 달고 있었다. 아흔 해 동안 장모님의 입안 깊은 곳을 지키며 수없이 많은 끼니를 씹어낸 어금니 하나. 의사가 솜을 집어넣어 주며 “꾹 물고 계세요” 하고 말하자, 장모님은 힘이 빠진 턱에 겨우 힘을 주며 무언가 웅얼거렸다. 나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그저 장모님의 여윈 손을 가만히 잡았다.


인천 하이요양원에서 장모님을 모시고 나와 세종병원으로 향하던 차 안은 내내 조용했다. 며칠 전부터 치통으로 식사를 전혀 못 하신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때, 장모님의 뺨은 조금 부어 있었고 눈빛은 멍했다. 잇몸 속에서 염증이 번져 어금니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했다. 아흔의 몸에서 오래 버틴 이를 뿌리째 뽑아내는 일은 단지 이를 하나 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장모님의 몸이 오랫동안 지켜온 자리 하나를 비워내는 일이었다.


병원 문을 나와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가는 길, 차창 밖으로 인천의 덤덤한 거리 풍경이 흘러갔다. 장모님은 입에 번지는 피를 삼키느라 가끔 침을 넘기셨고, 나는 거울을 통해 뒷좌석에 앉은 장모님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조수석 옆에 놓인 봉투 안에는 방금 죽집에서 산 호박죽이 들어 있었다. 어금니가 빠져나간 자리가 허전해서일까, 장모님은 자꾸만 혀끝으로 텅 빈 잇몸 자리를 더듬거리시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오래 견뎌온 것들이 하나씩 떠나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은 서럽고 쓸쓸한 일이다. 나라는 사람이 점점 작아지고 희미해진다는 두려움이 문득 가슴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장모님 역시 오늘 입안의 어금니 하나를 잃어버리시며, 몸에서 무언가 커다란 조각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허전함을 느끼셨을지도 모른다.


요양원 방에 도착해 장모님을 침대에 모셔다 드렸다. 솜을 뱉어낸 뒤 따뜻한 호박죽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어드렸다.


부어올랐던 잇몸의 붉은 기운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가만히 잇몸으로 삼키는 달콤한 죽 앞에서 장모님의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해 보였다. 오랫동안 당신을 괴롭히던 알싸한 통증이, 역설적이게도 그 어금니를 빼내고 나서야 비로소 멈춘 것이다.


놓아버리면 당장은 허전하고 슬프지만, 그 빈자리로 비로소 고요가 찾아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헐거워지고 아프면서도 차마 놓지 못해 붙잡고 있던 것이 어쩌면 삶의 통증이었을지도 모른다. 어금니를 뽑아낸 장모님의 입안처럼, 상실이 남긴 자리는 휑했지만 더 이상 아프지는 않았다.


요양원을 나오는 길, 장모님은 여윈 손을 들어 나를 향해 천천히 흔들어주셨다. 그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노을이 지는 인천의 하늘이 비어 있어서 더욱 넓고 붉었다.



*같이 보면 좋은 글

비우는 법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 작가 방철호의 블로그 방문하기

[전자바카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

이전 08화코스트코에서 길을 잃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