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와 귀환 이후의 인간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다.
고향을 떠난 지 이십 년 만이다.
이타카에서 트로이로, 다시 트로이에서 이타카로.
한 남자가 집을 떠나 전장과 바다 위에서 보낸 세월이다.
그중 십 년은 귀향을 위한 방황이었다. 그는 괴물을 마주했고, 자신의 오만을 시험받았으며, 동료들의 불신과 의심 속에서 수없이 흔들렸다. 신들의 변덕을 견디는 동안 동료들을 하나둘 잃었고, 마침내 자신의 이름마저 숨긴 채 고향의 해안에 닿았다.
그러나 그 모든 시련을 관통한 단 하나의 열망만은 변하지 않았다.
"돌아가야 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귀환은 오디세우스가 완수해야 할 최종 임무였다. 돌아간다는 것은 곧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일이다. 아내와 아들을 되찾고, 왕국을 되찾으며, 자신의 이름과 자리를 되찾아 질서를 회복하는 것.
오디세우스의 대서사는 결국 귀환을 향해 수렴하며 그렇게 막을 내린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는 그 오래된 공식을 마지막 순간에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그것도 철저하게.
돌아온 자는 왕좌에 앉지 않는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다시 바다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이십 년을 방황한 끝에 겨우 집에 도착한 사람이 왜 다시 떠나는가?
이 역설적인 이미지 속에서 놀란은 《오디세이》를 단순한 귀환의 서사에서, 귀환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인간의 죄와 기억에 관한 이야기로 전환시킨다.
피 묻은 귀환
구혼자들은 처참하게 쓰러진다. 활시위가 당겨지고 화살이 날아가며, 술과 음식으로 가득 찼던 이타카의 궁전은 피비린내로 채워진다.
관객은 다소 답답하게 느껴졌던 이전의 전개에서 일종의 통쾌함과 해방감을 경험한다. 마침내 돌아온 왕이 자신의 집을 점거한 자들을 처단하고, 이십 년의 부재 끝에 주인이 돌아와 질서를 회복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란은 그 승리감에 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구혼자들이 모두 쓰러진 뒤, 관객의 시선을 이끄는 곳은 왕좌가 아니다. 페넬로페의 품으로 무너져 내리는 한 남자의 몸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영웅의 귀환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오디세우스는 피를 흘린 채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롭다. 전장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병사처럼 보인다. 아니, 어쩌면 전장에서 입은 모든 상처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몸에 새긴 채 돌아온 사람처럼 보인다.
페넬로페는 마침내 그를 품에 안는다. 그토록 품에 안고 싶었던 남편이, 이십 년 동안 기다린 사람이 마침내 눈앞에 있다. 그러나 기다림의 끝에서 그녀가 마주한 것은 귀환한 왕의 장엄한 모습이 아니라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남편이다.
그래서 그녀는 애원한다.
“You can't die. Not now, please. I've waited so long.”
이 짧은 대사에는 이십 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에서 이 말은 가장 절박한 시간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긴 세월 기다렸던 사람이 이제 돌아왔는데, 돌아온 바로 그 순간 다시 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페넬로페에게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가 살아 있어야만 이십 년의 기다림이 비로소 '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그녀에게 예상 밖의 대답을 건넨다.
“Not death, exile.”
죽음이 아니라 추방이라는 대답.
이 한마디로 영화는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새로운 비극으로 전환시킨다.
그는 죽지 않는다.
그러나 '이타카의 왕'으로서의 자신은 바로 이 순간 죽어야 한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에 속할 수 없는 사람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가 목적지였다면, 놀란의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는 죄를 판가름하는 심판대가 된다.
원작과 다른 결말은 바로 여기서 결정된다.
원작의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와 잃어버린 권리를 회복한다. 또한 페넬로페와 재회하고 구혼자들을 처단하며 자신의 왕국을 되찾는다. 귀환은 질서의 회복이자 새로운 출발이다.
그러나 놀란은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이미 그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트로이, 목마, 불타는 도시, 죽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승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던 폭력. 그는 'Nobody(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 귀환을 완성했다.
놀란 감독이 영화를 통해 던진 질문은 "얼마나 훌륭한 전략이었는가?"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이다.
"무엇을 얻기 위해 인간은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가?"
트로이 목마는 단순한 지략이 아니다. 평화의 선물을 가장해 적의 신뢰를 이용하는 순간, 인간 사이의 가장 오래된 약속 하나가 깨진다. 손님과 주인의 관계, 평화와 전쟁의 경계, 타인을 믿을 수 있다는 최소한의 질서, 즉 "제우스의 법"을 철저히 농락한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적을 이겼지만, 그 승리의 과정에서 인간이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세계 자체를 훼손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그 죄를 트로이에 남겨두지 않고 이타카까지 가지고 돌아왔다.
전쟁은 끝났어도 오디세우스 안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구혼자들을 처단하는 장면은 사적 복수극이 아니라 트로이의 반복이다. 목마처럼 'Nobody'로 궁에 침투하여 문을 잠그고 도륙하는 방식은 트로이에서의 폭력을 그대로 재현한다.
물론 구혼자들은 트로이인들과 다르다. 그들은 오디세우스의 집을 점거하고 재산을 탕진했으며, 그의 아내를 압박했다. 그들을 처단하는 것은 충분히 정당해 보인다.
그러나 놀란은 그 정당성 뒤에 폭력을 숨겨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장면을 통해 묻는다. 한 번 피로 물든 기억은 또 다른 피로 씻어낼 수 있는가?
그리고 모든 구혼자들이 쓰러진 뒤 발견한 것은 승리의 왕좌가 아니라 페넬로페의 품이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는 전쟁에서 돌아왔지만, 전쟁은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았다. 트로이는 무너졌지만 그 안의 오디세우스는 여전히 살아 있다.
만약 그가 다시 왕이 되어 이타카를 통치한다면, 그 왕좌에는 이타카의 왕이 아닌 트로이의 전쟁 영웅이 앉게 될 것이다. 놀란은 그 가능성을 거부한다.
왕관을 쓰지 않는 영웅
그리하여 아들 텔레마코스가 왕이 된다. 이 선택이 영화가 원작에서 가장 심하게 비틀어지는 지점이자, '놀란의 오디세우스'를 가장 확실하게 규정하는 순간이다.
평생 왕이 되기 위해 돌아온 것처럼 보였던 남자가 돌아온 순간 스스럼없이 왕관을 아들에게 건넨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오디세우스가 생애 처음으로 선택한 비영웅적이고도 고귀한 결단이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위해 싸우지 않는 진정한 'Nobody'가 되기로 한다. 자신이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믿었던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영웅 서사에서 권력의 포기는 온전한 결말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영웅은 언제나 고난 끝에 왕좌와 영광이라는 보상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란은 이 대중적인 공식을 깨뜨린다. 오디세우스가 얻은 진정한 보상은 왕좌가 아니라, 왕좌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자아의 해방이다.
페넬로페가 기다린 것은 왕이 아니었다
이때 페넬로페의 존재가 다시 중요해진다.
이십 년 동안 그녀가 기다린 것은 왕좌에 앉을 통치자가 아니다. 그녀가 기다린 것은 '오디세우스'라는 한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영화 결말의 사랑은 왕권이나 국가라는 값보다 훨씬 오래되고 사적인 형태를 띤다.
페넬로페는 그에게 죽지 말라고 애원하지만, 그가 왕이어야 한다거나 영웅이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살아 있기만을 바란다. 이 순간 놀란의 영화는 거대한 신화에서 아주 사적이고 절절한 러브스토리로 수렴한다.
왕국도, 신들도, 전쟁의 명분도 사라지고 남는 것은 한 여자의 두려움과 한 남자의 상처,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이십 년의 세월뿐이다.
“Not death, exile.” (죽음이 아니야. 추방이야.)
오디세우스의 이 대답은 희망처럼 들리지만 곧 슬픔으로 바뀐다. 그는 살아남지만 이타카의 왕으로는 남지 않는다. 페넬로페를 얻는 대신 집을 포기하고, 아들을 되찾지만 아들의 왕국에서 왕이 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잔인한 역설인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십 년간 싸웠던 남자가 마침내 돌아온 순간 다시 집을 떠날 수밖에 없다니.
다시 바다로
마지막 배가 수평선을 향해 나아간다.
이 장면은 아름답고도 슬프다.
또한 영화에 다시 등장한 바다는 처음의 바다와 완전히 다른 의미를 품는다.
첫 항해의 바다가 그를 가족과 고향으로부터 갈라놓은 장애물이자 시련이었다면, 마지막 바다는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그는 다시 배에 오른다. 이번에는 어딘가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고 온 과거와 화해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서다.
그 곁에 페넬로페가 함께한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오디세우스는 혼자 떠나지 않는다. 이십 년을 기다린 여인이 그의 옆에 앉아 있다. 그러므로 이 떠남은 이별이 아니라,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선택하는 삶이다.
집을 잃은 것이 아니라, 집의 의미를 바꾼 것이다
놀란은 집이라는 개념을 재정의한다.
집은 더 이상 왕궁도, 왕좌도, 국경도 아니다.
집(Home)은 곧 '함께하는 사람'이다.
오디세우스에게 집이 이타카라는 공간이었다면 이타카를 떠나는 그는 집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페넬로페가 곁에 있기에, 그는 처음으로 '집을 품은 채' 떠나는 셈이다.
이것은 원전의 귀환과 정반대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는 집을 되찾기 위해 바다를 건넜지만, 놀란의 오디세우스는 집을 품은 채 다시 바다로 나아간다.
그리고 남는 것은 이야기다.
왕국은 언젠가 잿더미가 되고 문명과 궁전은 무너지며 인간은 죽는다. 시간을 견디고 남는 것은 오직 이야기뿐이다. 오디세우스가 더 이상 이타카의 왕이 아닐지라도 그의 이름은 남는다. 이제 사람들은 'Nobody'가 아닌 오디세우스를 기억하게 된다.
그가 트로이에서 저지른 죄의 무게도, 바다에서 견딘 고독도, 페넬로페가 감내한 기다림도 모두 서사 속에서 계속 숨 쉰다. 이것이 바로 놀란 감독이 신화를 다루는 방식이다.
신화 속 영웅은 육체의 영생이 아닌 기억 속 이야기로 살아남는다. 왕국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는 일이다.
귀환은 끝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는 일이다
결국 놀란이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집에 돌아올 것인가?"가 아니다. 그 질문은 이미 수천 년 전에 답해졌다. 놀란이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 것은 이것이다.
"목적지에 도달한 뒤, 당신은 과거의 상처와 유령을 안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호메로스의 귀환이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이었다면, 놀란의 귀환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고백이다. 페넬로페의 애원 속에서 오디세우스는 죽는 대신 영웅이자 왕이었던 자신을 떠나보낸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나아간다.
오디세우스의 진정한 귀환은 이타카에 발을 디딘 순간이 아니라, 아내 페넬로페와 함께 이타카를 등지고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그 순간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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