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 오디세우스의 오만과 Nobody의 지혜

자신을 지우고 나서야 비로소 돌아온 귀향의 서사

byItz토퍼
빗각(BitGak) 16
오만과 지혜


트로이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오만한 사람인가, 아니면 지혜로운 사람인가? 빗각의 시선으로 두 모습을 원작 속 이야기로 풀어보도록 하자.

by ChatGPT + Itz Topher


트로이가 무너지던 날, 오디세우스는 승리자이자 영웅이었다.


그가 고안한 목마 하나로 십 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으니, 세상 누구보다 지혜롭다고 불릴 자격이 충분했다. 그런데 그 지혜로운 자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데는 다시 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십 년을 전장에서 싸우고, 또다시 십 년을 바다에서 방황하게 되는 영웅의 서사시. 그 속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겠지만, 가장 먼저 던지게 되는 질문은 바로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가' 하는 점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트로이에서 이타카까지의 거리는 정말 가깝다.


순풍을 탄다면 불과 며칠이면 도착할 수 있는 짧은 바닷길이다. 그 길을,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방황해야 했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몇 달도 아닌 십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던 것일까? 아무리 고대의 사건이라고 하지만 교통문제만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원작 속 주요 사건들을 차근차근 짚어보며, 오디세우스라는 한 인간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드러나는 평범함과 영웅다움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오늘날이면 직접 운전을 해서 이틀이면 갈 수 있는 여정이다 / by 구글 지도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주제가 하나 있다. 바로 그리스 신화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인 ‘제우스의 법’이다.


이 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다면, 오디세우스가 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바다를 떠돌며 귀향하지 못했던 이유를 단순한 모험과 우연의 연속으로만 볼 수 없게 된다. 그의 긴 표류는 우연히 거듭된 불행이 아니라, 신들의 질서와 인간의 선택이 얽혀 빚어낸 신화적 운명의 과정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디세이아》에서 ‘제우스의 법’은 인간이 지켜야 할 신성한 질서와 도덕적 의무를 의미한다. 특히 제우스는 나그네와 손님을 보호하는 신으로 여겨졌기에, 손님을 정중히 대하고 환대하는 ‘크세니아’가 중요한 규범으로 작용한다. 나아가 환대뿐만 아니라 맹세, 충성, 가족에 대한 의무 등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신성한 질서를 존중해야 하며, 이를 배신하거나 어긴 자는 결국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된다.


무엇보다 시작부터 바다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하나의 사건이 불씨가 되어, 바다는 점점 더 거대한 장애물로 변해갔다.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 오디세우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안으로 들어가길 고집했다.

거인이 손님을 어떻게 대접하는 자인지 보고 싶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오디세우스의 무모한 호기심이라는 선택의 대가로 부하 여섯이 거인에게 잡아먹혔다.


궁지에 몰린 그는 한 가지 꾀를 냈다.

자신의 이름을 묻는 폴리페모스에게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Nobody)'"라고 답한 것이다.


그리고 술에 취해 잠든 거인의 외눈을 찌르고 도망칠 때, 비명을 듣고 몰려온 이웃 키클롭스들이 "누가 너를 해쳤느냐" 물었다. 폴리페모스는 "아무도 아니다(Nobody)가 나를 해쳤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고, 이웃들은 그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


이름을 지워버린 덕분에 그는 완전한 자유와 목숨을 얻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오디세우스의 지혜다.


그렇게 사건은 끝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배에 오른 뒤 뒤를 돌아보았다. 부하들이 제발 그만하라 애원했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 고향의 이름까지 큰소리로 외쳤다.


명성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목숨보다 앞섰던 순간이었으며, 영웅적 오만함이 드러난 결정적 장면이었다. 폴리페모스는 그 이름을 붙들고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저주를 빌었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그날부터 오디세우스가 지나는 길마다 거친 파도를 세웠다.


그러나 신의 폭풍만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포세이돈의 분노를 피하려 애쓰던 그들에게 찾아온 다음 시련은, 오디세우스 자신의 오만이 아닌 부하들의 어리석음과 불신이었다.


그들이 바람의 섬에 이르렀을 때, 바람의 지배자 아이올로스는 오디세우스 일행을 불쌍히 여겨 환대해 주었다. 그리고 안전한 귀향을 돕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는 부드러운 순풍을 제외한 모든 거친 바람들을 억센 가죽 자루에 가두어 선물로 주었다.


아이올로스의 배려 덕분에 그들은 아홉 날 아홉 밤을 쉬지 않고 항해했고, 마침내 고향 이타카의 흙먼지와 밤불이 눈앞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피로에 지친 오디세우스가 잠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에 부하들의 어리석은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들은 자루 안에 오디세우스 혼자 독식할 금은보화가 들었으리라 지레짐작하고 몰래 끈을 풀어버린 것이다.


갇혀 있던 온갖 바람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했던 고향을 뒤로하고 배를 다시 아득한 먼바다로 밀어내 버렸다. 눈앞에서 고향을 놓친 이 허망한 좌절은 신의 분노가 아닌 인간 스스로의 욕심과 불신이 부른 비극이었다.




그렇게 표류하던 배가 마침내 닿은 곳은 마법사 키르케의 섬이었다.


키르케는 손님으로 찾아온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에게 술을 건넨다. 그러나 그 잔에 담긴 것은 환대가 아니라 저주였다. 마법이 몸을 휘감는 순간, 인간의 얼굴과 언어와 이성은 하나씩 벗겨지고 그들은 돼지의 형상으로 떨어진다.


인간이 짐승으로 변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가 변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인간 자신에게서 빼앗는 일이다.


놀란은 이 장면을 우화적인 마법의 순간으로 지나치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이 무너지고 존엄이 짐승의 몸 아래 짓눌리는 과정을 거의 악몽처럼 밀어붙인다.


그래서 키르케의 섬은 아름다운 신화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쉽게 인간이기를 박탈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끔찍한 장소로 변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헤르메스가 건네준 신비한 약초 하나로 마법을 견뎌내고, 칼을 빼 든 채 키르케를 위협하여 부하들을 다시 사람으로 되돌려놓았다.


여기까지는 지혜와 용기가 승리한 영웅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목숨을 걸고 위협하던 그가 어느새 그녀의 침상에 눕고 식탁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하들이 이제 그만 고향으로 가자고 청할 때까지, 그는 자그마치 일 년을 그 섬에서 머물렀다.


위험이 사라진 순간, 유혹과 안락함 앞에 쉽게 발이 묶이는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난 대목이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난 후, 키르케는 그를 놓아주며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고향으로 가는 길을 알려면 먼저 저승, 즉 죽은 자들의 땅 하데스로 가서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디세우스는 검은 피를 부어 죽은 혼백들을 불러냈고, 거기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세 가지를 얻게 된다.


첫째,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경고였다.

헬리오스의 섬에 이르더라도 신성한 소떼에는 절대 손대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를 어기면 배와 부하를 모두 잃고 자신만 홀로 남게 되리라는 예언이었다.


둘째, 어머니 안티클레이아의 혼백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병도 화살도 아닌, 아들을 향한 그리움과 근심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아버지 라에르테스가 궁을 떠나 시골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슬픔 속에 늙어가고 있다는 것, 아내 페넬로페가 여전히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 없이도 영지를 지키며 자라고 있다는 것을 전해주었다.


그는 자신이 떠나 있는 동안 고향에서 누가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지금까지 그를 움직인 것이 명예욕이나 생존 본능이었다면, 이 장면 이후로는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리움에 대한 죄바카라감, 그리고 늙어가는 아버지와 기다리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그를 끝까지 고향으로 밀어붙이는 가장 끈질긴 동력이 된다.


셋째, 전우 아가멤논의 혼백이었다.

그리스군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은 자신이 귀향하자마자 아내의 손에 죽임 당한 사연을 들려주며,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절대 곧바로, 무방비하게 나타나지 말라고 당부했다.


저승에서 얻은 이 경고는 훗날 그가 변장한 거지의 모습으로 몰래 이타카에 잠입해 상황을 살피는 지혜가 된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그는 가장 절박한 귀향의 이유와 지혜를 동시에 얻은 셈이다.

by ChatGPT

하지만 저승에서 얻은 지혜에도 불구하고 위험은 계속되었다. 세이렌의 노래는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아 피했고, 스킬라와 카립디스 사이를 지나며 여섯 명의 부하를 또 잃었다.


그리고 마침내 헬리오스의 섬에 이르렀을 때, 예언자의 경고를 알고 있었음에도 굶주림에 지친 부하들은 결국 신성한 소를 잡아먹었다. 그 대가로 배는 부서졌고 선원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오디세우스 혼자만 부서진 널빤지에 매달려 살아남게 된다.




그렇게 혼자가 된 오디세우스는 표류 끝에 칼립소의 섬 오귀기아에 닿게 된다. 칼립소는 그에게 불멸을 약속하며 곁에 머물기를 청했고, 오디세우스는 여기서 자그마치 칠 년을 보냈다.


키르케 때와 달리 이번에는 스스로 눌러앉은 것이 아니라 신의 힘 자체에 억류된 것이었다. 매일 바닷가에 나가 물결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그는, 영원한 청춘과 안전이 눈앞에 있었음에도 늙어가는 아내와 낡은 고향의 방을 그리워했다.


신들이 마침내 헤르메스를 보내 칼립소에게 그를 놓아주라 명한 뒤에야, 그는 뗏목 하나에 의지해 다시 바다로 나설 수 있었다.


오디세우스의 귀환길에서 발생한 몇 사건만이라도 정리해 보면, 아주 재미있는 결이 드러난다.


키르케의 섬에서 보낸 일 년, 칼립소의 곁에서 흘려보낸 칠 년. 십 년에 가까운 세월 가운데 무려 팔 년이 여신들의 품에서 흘러갔다. 위기 앞에서는 누구보다 냉철하고 용맹했던 영웅이었지만, 정작 여신의 유혹과 위안 앞에서는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 두 시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뿌리가 조금 다르다.


키르케의 섬에서 그가 눌러앉은 것은 역설적으로 위험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던 순간이 끝나자 그를 앞으로 떠밀 절박함이 사라졌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안락함이었다. 밀어낼 위협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인간 의지의 공백이었던 셈이다.


반면 칼립소의 칠 년은 신의 권능 아래 붙들려 있던 무력함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무력함 속에서도 그는 매일 눈물로 저항했다. 몸은 붙잡혔지만 그리움만은 정복되지 않았다.


자유가 주어졌을 때는 의지가 쉽게 풀어지고, 자유가 완전히 박탈되었을 때는 오히려 그리움이 마지막까지 버틴다. 인간은 위협이 없으면 나태해지고 힘이 없으면 무너지지만, 그 무너짐 속에서도 무언가를 향한 갈망만큼은 끝내 지워지지 않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결국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을 늦게 만든 것은 하나의 원인이 아니었다.


포세이돈이라는 신의 분노, 그 자신의 지나친 자만심과 명예욕, 곁에 있던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배신, 그리고 여신들 곁에서 쉽게 풀어지고 마는 나약함까지. 이 모든 것이 겹치고 겹쳐 십 년이라는 시간을 만들었다.


by Gemini

그런데 이 모든 사건을 관통하는 핵심을, 나는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하고 싶다.

바로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 시작된 '이름'이다.


그는 여기서 '아무도 아니다(Nobody)'라는 이름으로 완전한 자유와 안전을 얻게 되었다.


이름을 지운 자는 추격당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의 동굴을 벗어나면서 그 익명의 안전을 스스로 걷어차고, 굳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본명을 외쳤다. 그 대가로 십 년의 방랑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십 년의 끝, 마침내 이타카 해변에 닿았을 때 그는 영웅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지 못했다. 여신 아테나의 도움으로 늙고 남루한 거지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자기 집 문간에서 자신을 숨긴 채 상황을 엿보았다.


저승에서 아가멤논이 경고했던 대로, 그는 다시 한번 '아무도 아닌 자(Nobody)'가 되어야만 안전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결국 그의 십 년은 원을 그리며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그는 이미 한 번, 이름을 버림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손에 쥐었던 사람이다. '아무도 아닌 자'에게는 추격도, 저주도, 바카라임도 따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그 자유를 오만함 하나로 스스로 내던졌다.


그리고 십 년이라는 대가를 남김없이 치르고 나서야, 그는 다시 '이름 없는 자(Nobody)'로 돌아가야만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장 지혜로운 자가 가장 어리석은 선택으로 십 년을 잃었다. 그리고 그 십 년의 끝에서, 그는 처음에 이미 알고 있었던 지혜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이것이 바로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이 짊어진 비애다.


우리가 그토록 애써 얻으려는 이름과 인정,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갈망. 그 갈망은 때로 우리를 가장 오래, 가장 멀리 떠돌게 만든다. 돌아갈 곳을 두고도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바깥의 폭풍이 아니라 안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그 목소리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승리의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사람이, 결국 자신을 지워내고 나서야 비로소 돌아올 수 있었던, 씁쓸하고도 역설적인 영웅의 서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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