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거절하고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택한 한 사내의 이야기
빗각(BitGak) 14
무한과 유한
영화 《트로이》가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을 스크린에 옮긴 지 22년.
이제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 영웅의 귀향이 다시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영화 《오디세이》는 10년간의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 또 다른 10년 동안 겪는 신화적 모험과 시련을 그려낸다.
30여 년을 타국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이만한 영화가 또 어디 있을까. 오디세우스의 삶을 통하여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다면, 이 영화는 나에게 단순한 신화를 넘어 삶을 비추는 또 하나의 바카라이 되어줄 것이다.
오귀기아 섬의 동굴 앞, 파도 소리마저 고요한 밤이었다.
오디세우스는 늘 그렇듯 오늘 밤도 바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등 뒤에서는 삼나무 타는 냄새와 향긋한 풀 내음이 흘러나왔다. 여신 칼립소의 동굴은 언제나 따뜻했고, 언제나 안전했다. 그러나 그의 눈과 마음은 늘 수평선 저편, 자신이 떠나온 곳을 향해 있었다.
칼립소(Calypso)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칼립토(kalyptō)에서 비롯되어 “감추다”, “숨기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오디세이』속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아름다운 섬에 붙잡아 둔 여신으로, 그녀의 이름은 고향으로 향하는 그의 길을 가리는 유혹과 동시에 현실을 잊게 하는 달콤한 안식을 상징한다.
칼립소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다가와 물었다.
"당신은 무엇이 부족한가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늙지 않는 몸과 죽지 않는 영원을 줄 수 있어요. 페넬로페는 지금쯤 주름이 지고 있겠죠. 나는 영원히 이 모습 그대로일 거예요."
아마 이 장면에서 세상의 모든 남자들, 최소한 성인 남자라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세상의 아내들도 마찬가지. 남편을 향해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라며, 한 손엔 먼지떨이를 들고 선악과를 들이밀지도. 부디 이 시대의 사내들이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지 않기를.
아무튼 오디세우스의 눈앞에 두 개의 삶이 놓여 있다.
한쪽에는 늙어가는 아내와 불확실한 귀향길이다.
폭풍과 난파, 괴물과 신들의 분노가 기다린다. 사실 냉정하게 말해서 살아 돌아간다는 보장조차 없다. 어쩌면 이타카에 닿기도 전에 바다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물고기 밥이 될지도 모른다.
설령 살아 돌아간다 해도, 그를 기다리는 것이 반가운 얼굴일지 낯선 얼굴일지조차 알 수 없다. 20년이라는 시간은 사람을 얼마든지 바꾸어 놓을 수 있으니까.
다른 한쪽에는 사랑과 영생을 약속하는 여신 칼립소가 있다.
그녀는 아름답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무엇보다 죽지 않는 영생을 약속한다.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영원한 젊음 속에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다. 밤마다 같은 별이 뜨고, 같은 파도가 치고, 영원히 한결같은 그녀가 곁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그 제안을 거절한다.
칼립소는 그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인간으로 살지 말고, 신처럼 살아라. 영원을 선택하라."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건넨 대답은 정반대였다.
"나는 신처럼 사는 것보다 인간으로 사는 것을 택하겠다. 영원 대신, 유한함을 선택하겠다."
우리는 흔히 그의 선택을 '아내에 대한 사랑'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설명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저자인 호메로스는 이렇게 전한다.
오디세우스는 낮에는 바닷가 바위에 앉아 하염없이 먼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밤에는 칼립소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늘 다른 곳에 가 있었다고.
이상한 일이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가.
사랑받는 사람이,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죽지 않을 사람이 될 수 있는데 왜 울었을까.
정말 사랑만으로 인간은 영생을 포기할 수 있을까.
나는 여기서 '빗각의 시선'으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칼립소가 약속한 것은 단순한 사랑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제안했다. 불멸, 영원한 젊음, 안전, 풍요, 그리고 여신의 사랑. 그녀는 심지어 페넬로페보다 자신이 더 아름답고 늙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까지 숨기지 않는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듯 담담하게, 그러나 은근한 자부심을 담아 말한다.
그 매력적인 미소와 유혹하는 눈길,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들. 이 모든 조건을 종합하면 칼립소의 제안은 '유혹'이라기보다 '최적의 인생 설계'에 가깝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오디세우스의 선택은 너무나 비합리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너무 비현실적이다.
칼립소가 약속한 것은 '시간이 멈춘 삶'이었다.
상상해 보자.
내일도, 십 년 후도, 백 년 후도 오늘과 똑같은 얼굴로 눈을 뜨는 삶을.
동굴 밖의 파도는 어제와 같은 리듬과 박자로 부서지고, 곁에 누운 칼립소의 살결은 오늘도 청춘의 모습 그대로 매끄러울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도, 사랑을 나누는 행위도 모두가 천 번을 반복해도 처음과 똑같은 느낌일 것이다.
변하지 않기에 애틋할 이유도 없다. 항상 함께 있어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그리워할 이유도 없다.
단 하루조차 상실이 없으니 재회의 기쁨도 없다. 영원히 함께하며 이별이 없으니 그리운 눈물의 의미도 사라진다.
그것은 삶이라기보다 아름답게 박제된 하루의 무한 반복일 뿐이다.
반면 오디세우스가 돌아가려 한 곳에는 늙음이 있다. 죽음도 있다. 기다림도 있으며 실패도 있다.
그가 떠날 때 강보에 싸여 있던 아들 텔레마코스는 이제 아버지의 얼굴조차 가물가물한 청년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아이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랐을지도 모른다.
아내 페넬로페의 검던 머리카락 사이로는 흰머리가 스며들었을 것이고, 그녀의 눈가에는 20년 치의 잔주름이 깊게 새겨졌을 것이다. 수많은 구혼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어쩌면 그녀는 이미 다른 이의 아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이타카에 닿는다 해도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오디세우스는 바로 그 불확실성, 그 늙음과 상실의 가능성 쪽으로 걸어가려 한다.
왜일까?
어쩌면 그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페넬로페의 주름 하나하나가 그녀가 기다림 속에 살아낸 20년의 증거라는 것을.
텔레마코스가 자신을 원망한다면 그 원망조차 아버지를 그리워했다는 증거라는 것을.
변하지 않는 얼굴보다 변해버린 얼굴 속에 새겨진 시간이야말로 사랑이 실재했다는 증표라는 것을.
하지만 칼립소의 섬에서는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는다.
오늘의 사랑도, 내일의 사랑도 그저 매끄러운 표면 위를 미끄러질 뿐이다.
그러나 이타카로 돌아가는 길에는 그를 기다리는 것이 설령 낯선 얼굴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그 얼굴에는 시간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새겨짐이야말로 신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언뜻 보면 인간은 신보다 불행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끝이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을 알기에 오늘을 사랑하고,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가족을 그리워하며,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 때문에 추억을 만든다.
만약 모든 것이 영원하다면 오늘도 내일도 결국 같은 하루일 뿐이다. 그리움도, 재회도, 눈물도 결국 아무 의미 없는 반복일 뿐이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시간을 없애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시간을 잃는 것이 곧 삶을 잃는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영원을 거절했다. 바위 위에서 다시 눈물을 흘리던 그날, 그는 어쩌면 이렇게 되뇌었을지 모른다.
'늙어가는 얼굴이라도 좋으니, 다시 한번 그 얼굴을 보고 싶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얼굴보다 시간이 새겨 놓은 얼굴을 그는 그리워했다. 그는 더 나은 조건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포기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다.
'빗각'이라는 이름에는 정면에서 보이지 않는 결을 발견하려는 태도가 담겨 있다.
익숙한 시선을 조금 비틀어 볼 때 비로소 새로운 빛이 스며든다.
오디세우스의 이야기 역시 그렇다.
정면에서는 충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조금만 빗각의 시선으로 보면, 그것은 너무나 인간다운 '인간'의 이야기다.
신은 죽지 않지만, 인간은 죽는다.
신은 영원하지만, 인간은 기다린다.
신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은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한다.
바로 그 결핍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오디세우스는 여신보다 아내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영원의 세계가 아닌 고향을 택하였다. 영원보다 시간을 선택했고, 완벽함보다 불완전함을 선택했으며, 신의 삶보다 인간의 삶을 선택했다.
호메로스는 이 서사시를 통해 수천 년 후의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떠나는가? 그리고 모험의 끝에서, 인간은 왜 그토록 고통스럽더라도 반드시 집으로 돌아와야만 하는가?"
그것은 모험과 귀향이야말로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디세이아』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을 깊게 움직이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더 오래 사는 삶을 꿈꾼다.
더 편안한 삶을 원하고, 더 안정적인 선택을 합리적이라 여긴다.
그러나 삶의 가치는 오래 지속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유한한 시간을 기꺼이 사용할 것인가에 있다.
정면에서 보면 오디세우스는 손해 보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빗각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는 가장 인간다운 선택을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은 완벽함을 향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끝이 있음을 알면서도 사랑과 귀향을 포기하지 않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훗날 뗏목을 엮어 홀로 바다로 나서던 날, 칼립소는 마지막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칼립소의 눈으로 보기엔 어리석은 선택.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칼립소의 곁을 떠난 한 사내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