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 트로이 목마에서 사라진 바퀴

크리스토퍼 놀란은 왜 트로이의 목마를 '굴러가지 않게' 만들었을까

byItz토퍼
by ChatGPT

빗각으로 보게 된 "오디세이" 속 '트로이 목마'


트로이의 목마에는 바퀴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성까지 끌고 갈 수 있으니까.


실제로 2004년 《트로이》의 목마는 바퀴(정확히는 통나무 굴림대) 위에서 굴러갔다.

그런데 20여 년 뒤 놀란이 만든 목마엔 바퀴도 없고, 통나무 굴림대를 이용하기도 적합하지 않다.


죽은 짐승의 사체처럼 모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정말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차이. 하지만 이 하나로 목마의 성격이 통째로 바뀐다.


이제 빗각의 시선으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의중을 하나씩 풀어보도록 하자.



20년 전부터 품어온 장면


이 장면은 놀란에게 새 아이디어가 아니다. 그는 2000년대 초, 데이비드 베니오프 각본의 《트로이》 연출을 맡았던 시절부터 이 문제를 붙들고 있었다.

목마는 원래 『일리아드』에 없던 삽화라, 각본에 넣는 순간 숙제가 하나 생긴다. 뻔히 적진에서 온 거대한 물건을 트로이인들은 왜 성 안으로 들였을까.


놀란이 찾은 답이 지금의 그림이다. 파도에 반쯤 파묻혀 곧 휩쓸려갈 것 같은, 아테나 여신에게 바친 봉헌물처럼 보이는 목마. 침입 병기가 아니라 버려진 제물처럼 읽혀야 트로이인이 성으로 들일 이유가 생긴다.


이 아이디어는 결국 페터슨의 손에서 다른 모습으로 완성됐고, 놀란은 20년을 묵혀뒀다가 《The Odyssey》에서 꺼내 썼다.


그러니 바퀴는 애초에 방해물이었다.

바퀴는 "이건 인간이 만든 운반 장치"라고 너무 친절하게 설명해 버리니까.


바퀴가 사라지면 사람이 보인다. 하지만 바퀴가 있으면 목마는 공학적인 물체로 끝난다. 바퀴가 없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저게 왜 저기 있는지, 왜 자꾸 모래에 파묻히는지 아무 설명이 없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결국 목마를 끌고 가는 사람들의 몸이다.


놀란은 실제로 높이 10미터, 무게 3.6톤짜리 목마를 여러 개 지었고, 촬영마다 배우와 스턴트 250명가량이 직접 밧줄을 당겼다. 반복되는 촬영에 구조물이 부서질 정도였다고 한다.


CG로도 충분히 흉내 낼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이렇게 한 이유는 하나, 실제 힘을 쓰는 몸은 카메라에 다르게 찍히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의 핵폭발을 CG 없이 찍은 감독다운 선택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명감독인지도.



승리의 도구에서 승리의 대가로


10년 싸운 영웅들이 전쟁 끝에 하는 일이 나무 말을 모래밭에서 끌어가는 것이라니, 행진이라기보다 장례 행렬에 가깝지 않나. 여기서 《오디세이》라는 영화가 갖는 무게감이 《트로이》와 결정적으로 갈린다.


두 영화 속 목마가 완전히 다른 해석을 얻게 만들기 때문이다.

《트로이》에서의 목마가 승리의 도구라면, 놀란의 목마는 승리의 대가에 가깝다.


그리고 이 대가를 가지고 《오디세이》라는 영화의 시발점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영화는 시작되고, 오디세우스에게 트로이 함락은 결말이 아니라 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10년을 바다에서 떠돈다.


그러니 목마도 쉽게 굴러가면 스토리 전개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귀환이 그렇듯, 이 목마도 쉽게 굴러가지 않아야 도입과 본 내용이 어울리게 되니까.



모래, 그리고 자유의 여신상


모래는 문명이 세운 것들을 말없이 덮어버리는 물질로 상징된다.


트로이도 결국 폐허와 이야기만 남았다. 그런데 놀란 감독은 이 이미지의 원천으로 《혹성탈출》 결말의 한 장면. 바로 해변 모래에 반쯤 파묻힌 자유의 여신상을 꼽은 적이 있다.


무너진 문명의 잔해가 모래 위로 솟아 있는 그 장면, 놀란의 목마도 정확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바퀴는 원래 앞으로 나아가는 도구지만, 모래는 만든 것을 다시 땅으로 되돌리는 물질로 상징되었다. 그래서 이 목마는 굴러가지 않고 시간을 두고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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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수레가 아니라 승리의 무덤


바퀴가 빠졌을 뿐인데 목마는 운반되는 물건에서 끌어야 하는 운명으로, 기계에서 유물로 바뀐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에 새로운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장면 속에 항상 빠지지 않는 얘기가 숨겨져 있다.


"인간이 운명을 속였다고 믿는 순간, 사실은 운명이 인간을 갖고 놀기 시작한다."


그러니 목마가 스스로 굴러가지 않는 게 맞다.

인간이 끌어야 하고, 아무리 끌어도 모래는 발목을 붙잡아야 한다.


CGI로 뭐든 만들 수 있는 시대에 놀란 감독이 굳이 실물을 짓고 사람 손으로 끌게 한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그는 관객이 목마의 크기를 이해하길 바란 게 아니라, 그 무게를 눈이 아닌 몸으로 느끼길 바랐다.


그래서 이 목마는 승리의 수레가 아니라 승리의 무덤을 연상시킨다.

이미 끝난 전쟁과 아직 끝나지 않은 운명 사이, 모래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것.


사실 세 시간 가까이 상영되는 영화 속에서 바퀴 하나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을 디테일이다.

정면으로 보면 그냥 지나가는 소품이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분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걸 살짝 빗겨서, 조금 비스듬한 각도로 들여다보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 하필 바퀴를 없앴을까?"라는 질문 하나가 승리와 운명, 노동과 문명, 인간과 신화까지 이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한 편의 영화조차도 정면으로만 볼 게 아니라 빗각으로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다.


세상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정면에서 보면 뻔한 것들도, 각도를 살짝 틀어서 비스듬하게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결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결을 찾아내는 순간, 그건 단순히 영화 한 편 잘 봤다는 재미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눈 하나가 더 생기는 일이고, 그만큼 내 삶도 조금 더 두툼해지는 일이다.

이번에 바퀴 하나를 붙잡고 여기까지 온 것도 그래서였다.


세상살이가

가끔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조금만 빗겨서 바라보면

거기서 또 다른 세상살이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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