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이 위로가 되는 나이가 있다

by선비천사

평생 동안 나는 앞뒤가 맞는 말의 세계에서 살았다.


칠판 앞에 서서 내가 수행한 일 또한 온통 정답만 골라 강단 있게 늘어놓는 일이었다. 역사와 슬롯라는 거대한 톱니바퀴는 무리수 하나 허용하지 않은 채 굴러갔고, 나는 아이들에게 정답으로 향하는 지도만을 보여주어야 했다.


칠판 위로 백묵 가루가 날릴 때마다 내 언어의 각질들도 함께 바래어 갔다.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온몸을 휘감던 날들이었다.


그 완강한 쇠사슬을 풀고 교단을 내려왔을 때, 내게 찾아온 것은 기묘하게도 ‘아무 말’에 대한 갈망이었다. 인과를 지운 자리, 맥락이 휘발된 골방에서 나는 비로소 아무렇게나 흐르는 내면의 웅얼거림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오늘 새벽, 베란다 세탁기 건조대 위에서 홀로 남은 양말 한 짝을 개키다가 문득 그 부조리한 실종에 생각이 머물렀다.


분명 두 짝을 나란히 밀어 넣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외톨이 하나다.


젊은 날의 나였다면 드럼통 밑바닥을 샅샅이 뒤집거나 배수구의 틈새를 의심하며 사라진 원인을 규명하려 들었을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저 잃어버린 한 짝이 우주의 어느 느슨한 웜홀을 타고 안드로메다쯤으로 자유롭게 날아갔으리라 싱긋 웃고 만다. 모든 상실에 구구절절한 이유를 대야 하는 삶은 얼마나 피곤한가.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때로는 이 헐거운 상상이 가장 밀도 높은 위로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식탁 위에는 아내가 남겨둔 먹다 만 피자 한 조각이 식어 있다. 도우 위에 뜬금없이 얹어진 파인애플 조각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구운 과일이라니, 이 무슨 맥락 없는 혼종인가 싶다가도, 한 입 베어 물면 새콤함과 짭조름함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혀끝을 적신다. 세상이 정해놓은 규격과 어울림의 규칙이란 본디 얼마나 유약한 것인가.


취향의 미세한 차이에도 사람들은 너무 쉽게 진영을 만들고 목소리를 높인다. 어쩌면 우리는 삶의 본질보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사소한 문맥에 너무 많은 생을 낭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조화는 논리를 뛰어넘는 곳에서 불쑥 피어난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아귀가 맞는 인간이 되라고 다그친다. 월요일 아침의 무력감에 ‘월요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게으름마저 그럴듯한 이유로 설명하려 든다.


하지만 삶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그저 이불속의 온기가 달콤하고, 잠시만 더 게으르고 싶을 뿐이다. 그 무거운 삶의 인력을 이겨내고 이른 아침 눈을 뜨는 것 자체가, 우리가 매일 행하는 가장 위대한 '아무 말'이자 기적이다.


길가에서 마시는 차가운 커피 한 모금에 대단한 나비효과가 숨어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그 쌉싸름한 액체가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일상의 톱니바퀴는 잠시 회전을 멈춘다.


의미를 따지지 않아도 되는 순간, 아무 이유 없이 숨 쉬어도 되는 자리에 비로소 당도하는 것이다.


결국 내가 쏟아내는 이 아무 말들의 연쇄는, 삶의 완고한 긴장감을 늦추기 위해 스스로 내어준 숨구멍이다. 바나나에서 기차로, 기차에서 비행기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유년의 말놀이처럼, 정처 없이 흐르는 생각의 끝에서 나는 비로소 세상이 덧씌운 엄숙함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진다.


말에 서린 뼈를 고르고, 문장에 넣었던 힘을 빼는 일. 그것이 은퇴(隱退)라는 단어가 내게 준 가장 아름다운 형벌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저녁에도 나는 집 근처 소래산 자락을 따라 오래 걸을 것이다.


어둠이 맥락 없는 안개처럼 산마루를 감싸 안을 때, 나는 입안에서 맴도는 무용한 문장들을 가만히 읊조릴 것이다.


이유를 대지 않아도 괜찮은 나이, 목적 없는 웅얼거림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시절. 세상의 문맥이 흐려질수록, 비로소 내 삶의 행간은 더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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