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장원 거울 앞에 앉으면 세월은 문득 잔인할 만큼 정직한 얼굴을 드러낸다. 집 안 욕실의 희미한 조명 아래서는 대충 얼버무려지던 흰 머리칼들이, 미장원의 서슬 푸른 형광등 아래에서는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채 낱낱이 드러난다. 눈 내린 듯 희게 바랜 머리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교단에 서서 분필 가루를 날리며 아이들 앞에 섰던 시간들, 이제는 희미한 기억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주름진 손 같은 것들이 저 하얀 빛깔 속에 켜켜이 내려앉아 있는 듯했다.
“원장님, 요즘 머리가 자꾸 가려운데 왜 이래요?”
멋쩍음을 감추려 무심히 던진 말에, 염색약을 개어 오던 미용실 원장님이 내 두피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고, 선생님. 뒤쪽이 많이 붉었네. 지루성 염증이 있어요. 이런 상태에서 염색하면 꽤 따가울 텐데.”
원장의 익숙한 말투에 나는 그저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 삶의 풍파를 견디고 피어난 백발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속살은 계절의 변화조차 버거워 붉게 짓무른, 은퇴자의 정직한 병증일 뿐이었다. 하얗게 덮인 머리칼을 들춰낼 때마다 드러나는 벌건 두피는 지나온 세월의 훈장이 아니라,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노화의 고발장 같았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영혼의 시계는 여전히 푸른 숲길을 청년처럼 거침없이 달리고 있는데, 몸의 시계는 붉은 염증으로 제 속도를 고발하고 있었다. 마음은 아직도 치열했던 현역의 중심에 서서 세상과 부딪치고 싶어 하지만, 육체는 조용히 뒤안길로 물러서라며 통증의 신호를 보낸다. 이 부조화를 감추려 따가움을 참아가며 염색약을 덧바르는 행위. 그것은 어쩌면 세상에서 아직 한 걸음 물러서고 싶지 않은 마음의 조용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티는 마음 말이다.
독한 약품이 두피에 닿는 순간, 원장의 말대로 머릿속이 화끈거리며 아려왔다. 차갑고도 매운 감촉이 상처 난 두피를 타고 번져갔다. 붓끝이 스칠 때마다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나는 거울 속 낯선 사내를 바라보며 묵묵히 그 시간을 견뎌냈다. 흰머리를 그대로 두는 것이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는 일이라면, 이 통증을 감수하며 머리칼을 검게 물들이는 행위는 아직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완전히 지워지고 싶지 않다는 작은 저항인지도 몰랐다.
“선생님, 이제 머리 감으실게요.”
원장의 말에 이끌려 샴푸대에 몸을 눕히자 미지근한 물줄기가 화끈거리던 두피를 부드럽게 씻어 내렸다. 뒷덜미를 받쳐 드는 투박한 손길이 굳어 있던 목덜미를 천천히 풀어주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뒤 다시 의자에 앉아 드라이어의 더운 바람을 맞고 있으니, 거울 속에는 조금 전의 초라한 노인이 아니라 제법 생기가 도는 사내 하나가 앉아 있었다. 붉게 드러나 있던 흔적들은 치밀한 검은빛 아래 잠시 가려졌고, 그 덕분인지 내 눈빛 또한 조금 또렷해진 듯 보였다.
미장원 문을 밀고 밖으로 나오니 대야동 거리에는 저녁노을이 사람의 등을 감싸 안듯 포근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코끝에는 은은한 약품 냄새와 두피의 미세한 아릿함이 번갈아 스며들었다. 몸의 경고를 알면서도 기꺼이 검은빛을 선택한 오늘의 외출은, 어쩌면 내가 이 세상과 아직 뜨겁게 악수하고 싶다는 보이지 않는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습관처럼 바카라상 앞에 앉아 스탠드 불빛을 켰다. 흰 화면 위로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게 염색의 따가움이 세상에 남아 있으려는 간절한 통증이라면, 원고지 위에 문장을 채워 넣는 일은 여전히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하는 마지막 숨결 같은 것이라고.
인생이라는 긴 문장을 돌아본다. 화려하게 치장했던 젊은 날의 수식어들은 빛이 바랬고, 곳곳에는 부끄러운 오탈자들이 남아 있다. 이제는 비대해진 욕망의 수식어들을 담담히 덜어내고, 삶의 문장을 조금씩 간결하게 다듬어야 할 시간이다. 다행히도 삶은 아직 내게 완성된 퇴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장 하나를 조용히 붙들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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