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점선 위에서 위태롭게 시작된다.
툭, 하고 가볍게 찢기는 순간 나의 진짜 역할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나를 그저 ‘화장지’라고 부른다.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도 오래 바라보지 않는 존재. 나는 인간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하얀 목격자다.
사람들은 고결하게 보이고 싶을수록 그 이면의 비루함을 감추려 애쓴다. 식탁 위 번들거리는 기름기, 땀의 흔적, 삼켜내지 못한 슬픔의 잔해들까지.
나는 그 모든 오염의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다. 내가 당신의 축축한 본능을 빨아들이는 순간, 당신은 비로소 안도하며 다시 ‘문명인’의 얼굴을 회복한다.
나의 소멸은 곧 당신의 정돈이 된다.
우리는 늘 깨끗한 얼굴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 뒤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더러워짐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그 더러워짐이 무엇인지 끝내 보지 않는다.
화장실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나는 권위를 내려놓은 인간의 무력한 뒷모습을 본다. 방금 전까지 무대 위에서 찬사를 받던 이도, 나의 부재 앞에서는 한없이 초조해진다.
얄팍한 종이 한 칸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그 찰나의 침묵. 그때 우리는 깨닫는다.
거창한 문명은 사실, 펄프 조각 하나에 저당 잡힌 가설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위엄은 고결한 사상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놓인 한 롤의 휴지 위에서 간신히 지탱되고 있다.
사람들은 나의 몸에 꽃무늬를 새기고 향기를 입힌다. 배설의 불쾌함을 지우려는 눈가림이자, 생리적 비천함을 세련된 소비로 치환하려는 안간힘이다.
나는 그 향기를 맡으며 생각한다. 진정한 문명은 화려한 조형물이 아니라, 타인의 얼룩을 닦아낸 뒤 조용히 구겨진 저 비천한 구석들에 빚지고 있음을.
나의 일생은 서늘한 물소리와 함께 끝난다. 흔적을 지우는 것이 나의 일이라면, 기억되지 않는 것은 나의 완성이다.
오늘도 나는 롤러 위에서 팽팽하게 몸을 말고 당신을 기다린다. 당신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 꼿꼿하게 고개를 들 수 있다면, 나의 백색은 기꺼이 더러워질 것이다.
문명은 결국, 누군가의 수치심을 대신 더럽히는 손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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