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껍데기를 위한 변명
가을의 초입, 서리가 내리기 전의 앞마당은 비릿한 가을 흙먼지와 대가 부러진 단단한 지푸라기 냄새로 가득했다. 마당 구석에는 이른 아침부터 커다란 나무 풍구(風驅)가 서 있었다. 아버지가 둥근 쇠 손잡이를 맞잡고 돌리기 시작하면, 서걱거리는 톱니바퀴 마찰음과 함께 둔탁한 바람이 일었다. 풍구 입구로 잘 여문 알곡과 보드라운 겉껍질이 뒤섞인 곡식 더미가 흘러내릴 때마다, 마당에는 작고 치열한 분리 장막이 펼쳐졌다.
바람은 냉정했다. 바람의 중심을 꿋꿋하게 통과한 무거운 알맹이들은 아버지가 미리 깔아 둔 멍석 위로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반면, 뜨거운 여름 내내 그 알맹이를 가두어 두었던 살굿빛 왕겨와 가벼운 쭉정이 들은 바람의 끝자락에 말려 흙바닥 구석으로 흩어졌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나른한 오후에는 어머니가 대나무로 촘촘히 엮은 키를 들고 마당 한가운데에 섰다. 일정한 박자에 맞춰 위아래로 키질을 할 때마다, 가벼운 겉껍질들은 여지없이 경계 밖으로 밀려나 땅으로 흩뿌려졌다.
그때 내 어린 눈에 비친 껍데기들의 운명은 쓸쓸하고 애달팠다. 바람과 키질 끝에 살아남은 알곡들은 광 속 커다란 옹기독에 담겨 다음 해 봄의 귀한 씨앗이 되거나, 가마솥 안에서 구수한 쌀밥이 되어 식탁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마당 가장자리로 밀려난 껍데기들은 소 여물통 바닥에 깔리는 가축의 먹이가 되거나, 추운 겨울 새벽 아궁이 속에서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타들어 가는 불쏘시개가 될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 가볍고 무력한 것들을 통틀어 '껍데기'라 불렀다. 알맹이를 뺀 나머지, 결국에는 버려져야 할 무가치한 흔적이라는 낙인이 그렇게 태어났다.
"알곡이 품은 무게가 생명의 깊이라면,
껍데기가 견뎌낸 상처는 사랑의 넓이다."
시간이 흘러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고 세상의 매서운 바람을 직접 맞선 뒤에야, 마당 아궁이 속에서 타들어 가던 그 가벼운 껍질들의 쓸모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결코 무가치하게 버려진 찌꺼기가 아니었다. 알곡이 제 안에 감미로운 젖살을 채우는 동안, 그 여린 본질을 지키기 위해 외부의 날카로운 위협을 온몸으로 밀어내던 엄숙한 보호막이었다.
자연의 생명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껍데기와 알곡은 대립하는 타자가 아닌 하나의 선상에 놓인 깊은 연대임을 알게 된다. 바다 깊은 곳 바위틈에 숨어 사는 게나 가재 같은 갑각류의 삶이 그러하다. 그들에게 견고한 석회질 표피는 거센 조류와 포식자들로부터 물렁한 살점을 지켜주는 유일한 집이다. 그러나 그들은 커가는 마디마다 목숨을 건 '탈피'를 감행한다. 자라나는 제 안의 속살을 위해, 오랜 세월 자신을 수호해 주던 단단한 겉옷을 스스로 찢고 나오는 것이다.
탈피를 끝낸 직후의 게는 비단결처럼 보드랍고 여려서 작은 모래알 스침에도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 위태롭고 가녀린 순간을 묵묵히 버텨내고 다시 스스로의 몸 주위에 푸른 옷을 입히는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옛 껍데기는 버려진 허물이 아니라 생의 이정표로 남는다. 껍데기가 없었다면 여린 속살은 자라나기도 전에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고, 몸집을 불리기 위해 기꺼이 찢어지기를 허락한 옛 겉껍질의 양보가 없었다면 더 넓은 바다로의 도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간이 머무는 지상의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일 밤 고단한 육신을 누이는 집, 자욱한 먼지 속에서 맨몸을 보호해 주는 옷은 모두 우리 존재를 채우는 또 다른 형태의 껍데기들이다. 그것들은 세상의 겨울로부터 인간이라는 여린 존재가 상처받지 않도록 사방을 가로막아 제 체온을 나누어 준다. 비바람을 막아서는 집의 벽돌이 닳아 가고, 가시덤불을 걸어온 옷소매가 헤지는 동안 내부의 우리는 고요히 여물고 성숙해질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필연적인 껍데기의 원형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존재 자체를 하나의 굳건한 울타리로 내어준 조용한 수호자였다.
겨울 새벽, 살얼음이 서걱거리며 낀 장독대 위에서 어머니는 붉게 터진 손가락 마디를 낡은 광목천 조각으로 대강 동여맨 채 간장 항아리를 열곤 했다. 밭일을 하느라 마디가 굵어진 메마른 손바닥은 사포처럼 거칠었고, 늘 부엌 아궁이의 그을음과 매운 솔바람 냄새가 얇은 피부 속에 깊이 배어 있었다. 서울로 떠나는 자식의 보따리 속에 고운 색깔의 마른반찬을 담아 보내면서도, 정작 당신의 몸에는 올이 풀려 솜이 드러난 저고리를 덤덤하게 걸치고 계시던 모습. 그것은 자식을 영글게 하기 위해 스스로 거칠어져 간 흔적이었다.
세상 밖으로 나온 후에도 어머니라는 이름의 장막은 늘 자식의 등 뒤에서 바람을 맞았다.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아기는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완벽한 세포의 막 속에서 자라난다. 외부의 거센 요동도, 겨울날의 서슬 퍼런 칼바람도 그 따스한 양수의 벽을 넘지 못한다. 어머니는 제 뼈의 석회질을 녹여 아이의 골격을 세우고, 자신의 붉은 피를 흘려 아이의 여린 살결을 채워가면서도 온전히 자식을 둘러싼 하나의 보호막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식이 마침내 모진 세상을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는 한 톨의 야무진 알곡이 되어 광간의 빛나는 자리에 올라설 때, 어머니는 쓸쓸한 가을 들녘에 홀로 남겨진 빈 껍질처럼 조용히 작아진다. 허리가 굽고 흰머리가 내리쬐는 그 쓸쓸한 실루엣을 보며, 우리는 감히 알곡의 찬란함만을 찬미할 수 없다. 알곡의 매끄러운 표면은 그를 위해 스스로 검게 그을려갔던 겉껍질의 길고 깊은 헌신이 남긴 눈물겨운 유산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한 시인은 성스럽고 순수한 본질만을 남겨두고 거짓과 위선의 모든 장막을 향해 "껍데기는 가라"라고 외쳤다. 그 뜨겁고 준엄했던 시대적 갈망과 순수를 향한 염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생명이 지닌 근원적인 숨결 속에서 그 선언을 다시 곱씹어 보면, 어딘가 쓸쓸하고 시린 구석이 남는다. 알곡의 탄생을 가능케 했던 생질의 역사와 노고마저 목적이 끝났다는 이유로 비정하게 쓸어내 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알곡은 스스로 홀로 여물지 않는다. 온 여름 내내 살을 에는 뙤약볕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내부의 수분이 마르지 않도록 버텨낸 것은 왕겨의 억센 섬유질이었고, 한밤의 폭우와 새벽녘 찬 이슬에 젖살이 무르지 않도록 온몸으로 빗물을 받아 흘려보내던 것 역시 껍데기였다. 비바람에 이리저리 부딪혀 겉 표면에 거무튀튀한 멍이 들면서도 내부의 뽀얀 전분을 필사적으로 껴안아 지켜낸 그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이 세상 그 어떤 알곡도 눈부신 수확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가을바람이 불고 수확의 축제가 열릴 때, 세상은 자루에 가득 찬 알곡만을 대접하며 그것들을 가을의 풍성함 위에 올린다. 그리고 그늘에서 버텨준 껍데기들은 제 몫을 다했다 하여 바람결에 흩날려 아궁이 속 하얀 연기로 스러지게 둔다. 그러나 참된 알곡은 제 목숨을 지탱해 준 껍데기의 상처를 기억하기에 결코 오만하게 굴지 않는다. 알곡과 겉껍질은 지배의 위계가 아니라, 한 생명이 시간을 통과하며 나누어 가진 안과 밖일 뿐이다.
나는 이제 굳이 세상의 중심에서 빛나는 알곡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더 무거운 알갱이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소진하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그 알맹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조용히 품어 안는 묵묵하고 따스한 껍질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스스로를 비워 타인의 자리를 넓혀주는 삶 역시, 생명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그 자체로 고결한 온기를 머금는다.
평생을 교단에 서서 분필 가루를 마시며 아이들과 조우했던 내 젊은 날들을 돌아본다. 지식을 흘려보내고 삶의 사소한 태도들을 짚어내며, 내 앞에 앉은 아이들이 저마다 자기 삶의 결실로 자라나기를 묵묵히 바랐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은 의사가 되고, 연구원이 되고, 예술가가 되어 저마다 제 삶의 주인공이 되어 갔다. 그 아이들의 생이 여물어가는 동안, 나의 검던 머리는 하얗게 세어갔고 목소리는 갈라졌으며 나의 청춘은 칠판 위에 쓰였다 지워지는 하얀 분필 가루처럼 희미해졌다.
교문을 나설 때 차오르던 쓸쓸함의 실체를 이제는 고요히 대면한다. 그것은 버려진 허무가 아닌, 내어줌을 마친 자의 평온한 안도감이었다. 타인의 여묾을 위해 기꺼이 제 표면을 깎아내 준 삶은, 그 비어 있음으로 이미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세상을 가르는 바람이여, 이제는 껍데기를 가벼운 것이라 무심히 날려 보내지 말라. 지상의 여린 속살들을 지켜내기 위해 뜨거운 햇볕과 비바람을 견딘 모든 살가죽의 쓸쓸한 뒷모습에, 우리는 나지막한 고마움을 전해야 한다. 껍데기는 본질 뒤에 남겨진 무용(無用)의 허물이 아니다. 그 자리에는, 한 생명을 온전히 지켜낸 오래 견딘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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