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는 흐려졌지만

— 내가 댓글을 읽는 이유

by선비천사

1. 망막에 번지는 안개


내 서재의 중심을 차지하던 육중한 바카라장들이 언제부턴가 조금씩 뒤로 물러앉기 시작했다. 30년 넘게 매일같이 마주하던 교실의 흰 분필 가루가 허공으로 사그라지듯, 내 시력의 중심부도 서서히 흐릿한 안갯속으로 번져갔다.


노안(老眼)이라는 불청객은 예고도 없이 찾아와 바카라 표지의 선명한 활자들을 자꾸만 짓뭉개 놓았다. 젊은 시절,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페이지를 넘기던 그 팽팽한 독서의 희열은 돋보기안경의 두꺼운 유리를 거치며 조각나고 흩어졌다. 바카라장을 펼치면 활자들이 개미 떼처럼 엉겨 붙어 눈이 먼저 피로를 호소했다.


처음에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활자의 바다에서 길을 잃어버린 노병(老兵)처럼, 나는 한동안 사방이 바카라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멍하니 손을 놓고 서성였다. 평생 지식을 가르치고 바카라을 탐독해 온 나에게, 텍스트의 상실은 곧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바카라장 속에 갇힌 문장들은 여전히 고결했으나, 내 침침한 눈은 더 이상 그 고결함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그렇게 종이바카라의 시대가 저물어갈 무렵, 내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화면이 새로운 창(窓)으로 들어앉았다.


그리고 그 창의 가장 깊숙한 밑바닥, 뉴스와 글들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댓글’의 세계가 눈에 들어왔다. 활자의 숲이 빽빽한 가시덤불로 변해버린 자리에 피어난, 가공되지 않은 인간 정신의 생생한 흔적들이었다.


2. 흘러가는 강물과 부딪히는 파도


과거의 바카라은 저자에게서 독자로 외로이 흘러가는 일방의 강물이었다. 독자는 그저 강가에 앉아 도도하게 흐르는 지식의 물줄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댓글의 세계는 다르다. 그곳은 누군가 던진 작은 돌멩이 하나에 무수한 파도가 실시간으로 일어나 사방으로 부딪히는 거대한 바다다.


스마트폰 화면의 글자 크기를 한껏 키우고 이 기묘한 광장을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디지털의 잔재가 아니었다. 사건이나 글을 접한 대중의 반응이 시차 없이 표출되며, 서론과 결론을 생략한 채 핵심적인 정서와 논리만을 한두 줄 안에 압축하여 던진다.


어떤 이가 글을 올리면, 각기 다른 인생을 산 무수한 개인이 저마다의 경험을 보태며 행간을 채워나간다. 물론 그 세계에도 눈이 찌푸려지는 독기와 악의는 넘쳐난다. 다만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예전보다 조금은 덜 정제된 오물들이 알아서 걸러질 뿐이다. 덕분에 나는 큰 기분 상함 없이, 그 날것의 에너지만을 온전히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짧고 즉각적인 고백들을 따라가다 보면, 불과 몇 분 사이에 수십, 수백 명의 마음속 방에 잠시 들어갔다 나오는 기분이 든다.


두꺼운 인문학 서적을 한 권 읽으려면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저자의 고독한 논리를 쫓아야 하지만, 잘 차려진 댓글 몇 장을 읽는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혜와 대중의 심리를 가장 압축적으로 간파하는 지름길이 된다. 돋보기를 치켜세우고 활자와 씨름하던 노년의 나에게, 이것은 아주 효율적이고 다정한 세상 이해의 방법이 되어주었다.


3. 익명(匿名)이라는 가면이 허락한 진실


내가 댓글의 세계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익명성’에 있다. 세상은 흔히 익명의 그늘 뒤에 숨은 칼날을 경계하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 가면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유일한 성소(聖所) 일지도 모른다.


만약 누군가 이 공간을 실명체제로 바꾸라 요구한다면, 댓글의 그 파릇파릇한 생명력은 그 즉시 질식해 버릴 것이다. 이름을 밝히는 순간, 인간은 슬롯적 지위와 체면, 타인의 시선이라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갇히게 된다. 군더더기 없는 진심 대신 서론이 길어지고, 겉치레와 위선, 그리고 도덕적인 훈계만이 가득한 지루한 웅변장으로 변질될 것이 뻔하다.


익명이라는 단단한 방패가 있기에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내면을 고백하고, 가식 없는 분노를 터뜨리며, 날카로운 직관을 가감 없이 배설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익명의 방패 뒤에서 튀어나오는 문장들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때 느껴지는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정치가들의 난해하고 위선적인 수백 마디 담화문을 단 한 줄로 요약해 뼈를 때리는 일침, 거대한 경제 위기의 징후를 서민의 장바구니 물가로 치환해 내는 기막힌 비유를 볼 때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알싸한 카타르시스가 차오른다. 때로는 거칠고 투박한 육두문자가 섞여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교과서적인 삶의 이면에 감춰진 인간 본연의 억압된 에너지를 대변해 주는 듯하여 묘한 대리만족을 준다.


물론 내가 탐닉하는 영역은 말초적인 자극이 판치는 대중 연예계의 소문이나 맹목적인 비방의 진흙탕이 아니다. 그런 가벼운 가십에는 애초에 관심도 없다. 내가 주로 머무는 곳은 쉽게 소비되지 않는 문장들이 남아 있는 댓글의 골목길이다.


놀랍게도 단 두세 줄의 짧은 문장 안에도 한 사람의 일생과 지식의 깊이, 그리고 숨길 수 없는 인품의 결이 그대로 배어 나온다.


4. 광장의 소음 속에서 느끼는 쓸쓸함


그러나 이 생생한 광장이 언제나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댓글 읽는 재미에 푹 빠져 밤을 지새우다가도, 스마트폰 화면을 끄는 순간 밀려오는 형언할 수 없는 허무함과 쓸쓸함이 있다.


아무리 사유가 깊은 댓글을 골라 읽는다 한들, 그것은 결국 조각난 지식이며 휘발성이 강한 감정의 파편들이다. 익명이 보장한 솔직함은 때로 인간의 가장 얄팍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내고, 군중심리에 휩쓸려 한 방향으로 쏠리는 무서운 괴물을 낳기도 한다. 화면의 푸른빛이 꺼지면 방 안은 이내 고요해지고, 나는 다시 눈이 어두운 노인으로 돌아온다.


그럴 때면 나는 돋보기안경을 벗고 가만히 어두운 서재를 바라본다. 한 사상가가 평생을 바쳐 고독하게 밀어 올린 바카라 한 권의 무게와, 수천 명이 순간의 감정으로 쏟아낸 댓글 수천 개의 무게를 저울질해 본다.


바카라이 깊고 고요한 우물이라면, 댓글은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분수대와 같다. 우물물이 주는 깊은 위로를 알던 내가 분수대의 화려한 물보라에 매료되어 있는 이 현상은, 어쩌면 노안으로 인해 늙어가는 내 육체가 세상의 빠른 속도를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서글픈 몸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타인의 즉각적인 반응에 기대어 외로움을 달래려는, 나이 든 독서광의 궁색한 변명 같아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5. 다시, 행간의 얼굴들을 마주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다시 스마트폰을 켜고 화면을 위아래로 쓸어 올린다. 비록 조각나고 휘발될지언정, 그 짧은 문장들 속에 담긴 한 사람의 인품과 지식, 그리고 삶의 철학을 발견하는 기쁨을 차마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소한 슬롯적 이슈 아래에 동양 철학의 구절을 얹어 은근한 여운을 남기는 이가 있고, 복잡한 경제 지표의 모순을 송곳 같은 숫자의 배열로 명쾌하게 해부해 내는 무명 씨가 있다. 맞춤법 하나, 문장 끝에 붙은 말줄임표 하나에서도 그 사람의 성격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인다. 그것은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각자의 삶에서 길어 올린 지혜의 파편들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거대한 야외 도서관이다.


종이바카라의 정적인 활자는 내 망막에서 흐려졌지만, 디지털의 푸른빛 너머로 걸어 나오는 익명의 얼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나에게 말을 건넨다. 그것은 고전 속 죽은 성인들의 말씀이 아니라, 나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숨 쉬고 고뇌하는 동시대인들의 거칠고도 따뜻한 숨결이다. 바카라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상실감의 자리에서 피어난 이 새로운 독서는, 나를 세상의 가장 뜨거운 한복판으로 다시 이끌어주었다.


활자는 예전보다 흐려졌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일만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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