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무언가를 놓친 것 같은 감각을 끌어안고 산다. 무엇을 놓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나간 시간인지, 선택하지 않은 삶인지, 앞으로도 갖지 못할 무언가인지. 계절성 우울증이라고 하기에는 그런 감정이 너무 자주 찾아온다. 병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자 선생님은 내가 어디로 이사하는지 물었다. 그쪽 병원을 추천해 주면서 상담도 알아보라고 했다. 병원도 이제 지긋지긋한데 상담까지 받아야 한다니. 언제쯤 이런 곳을 다니지 않아도 될까 싶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지난주에 만난 새로운 사람을 다시 만나야 할지 고민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상대의 배경이 좋은 동반자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면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경쟁적이거나 권위적인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다. 대화가 잘 통해야 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삶에 동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조건을 하나씩 따져보다가 정작 중요한 질문에 이르렀다. 나는 누군가와 같이 살 자신이 있는가. 대답은 '노'였다.
아직 시작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관계가 진전된다면 언젠가는 결혼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을까. 그 역시 결혼적령기이고, 만약 결혼할 사람을 찾고 있다면 나는 적합한 상대가 아니다. 나는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만나고 싶다. 서로의 생활을 존중하면서 가끔 만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관계. 하지만 상대도 그런 관계를 원할지는 알 수 없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더라도 한쪽이 결혼을 원하게 되면 결국 갈등이 생길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로서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할 자신이 없다.
결혼하면 혼자일 때와는 다른 바카라임이 생긴다. 생활을 조율해야 하고, 때로는 상대를 위해 양보해야 한다. 결혼은 기꺼이 상대에게 져줄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물론 상대도 나에게 양보할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얼마나 양보하는지 따져야 하는 관계라면 벌써부터 피곤하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다. 내가 원하는 조건을 갖춘 사람을 만나더라도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게 될까 봐 두렵다. 그렇다고 경제적인 조건을 우선해 사람을 선택하고 싶지도 않다. 상대의 배경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미래를 그려보면 돈을 걱정하는 것이다. 스스로도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과의 대화가 특별히 매끄럽게 이어졌던 것도 아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하면 그냥 아는 동생으로 남겨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나는 벌써 관계의 끝을 생각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면 결혼할 수 있을지부터 따지고, 결혼을 생각하면 함께 사는 생활이 걱정되고, 생활을 생각하면 자유를 잃을까 봐 두려워진다. 그렇게 미래를 앞당겨 생각하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랑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자 다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어쩌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결혼 자체보다도,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춰 살아야 하는 상황인지 모른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 나는 오랫동안 조직이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도 관계를 유지했다. 그 생활에서 벗어나기까지 십 년이 걸렸다. 이제 겨우 혼자 있는 시간이 생겼는데, 다시 누군가와 일상을 조율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댄스학원에 갈 시간이 됐다. 춤을 추기 시작하자 머릿속을 차지하던 생각들이 사라졌다. 동작을 따라가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몸을 움직이고 나니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90년대 힙합을 들었다. 병원에서 상실감을 느낀다고 이야기했을 때 선생님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차라리 미래를 생각하라고 했다. 병가 중에 이직을 고려해 보라고 권했던 것도 쉬는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그대로 멈춰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안다. 하지만 나는 당분간 좀 멈춰 있고 싶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고, 피아노를 치고, 새로운 일을 알아보기도 한다. 관심이 생기는 분야를 기웃거리다가 그만두기도 하고, 다시 다른 가능성을 찾아본다. 다만 그 모든 시도가 결국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였으면 하지는 않는다. 다시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해 저녁 여섯 시에 퇴근하는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답을 찾은 것도 아니다. 선생님은 미래를 생각하라고 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어쩌면 그가 말하는 미래와 다를지도 모른다.
온라인 게임을 구하고,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 누군가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삶. 많은 사람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나는 그중 무엇도 지금 당장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평생 혼자 살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니고, 다시는 취직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은 누구에게도 내 시간을 약속하고 싶지 않다.
연애도, 결혼도, 온라인 게임도 결국 일정 부분 자신의 시간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일이다.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쓸지 이제야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새로운 사람을 만날지 말지조차 서둘러 결론 내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