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요가를 다녀온 후 피아노를 치다가 병원에 갔다. 친 곡은 쇼팽 녹턴 Op.48-1, 파르티타 6번,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10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녹턴 13번을 계속 연습하다가 다른 곡으로 넘어갔는데, 그러고 나니 기분이 꽤 안정됐다. 요새는 무언가를 놓친 것 같은 감각을 끌어안고 산다. 계절성 우울증이라기엔 그 빈도가 잦고, 그래서 더 괴롭다. 쌤은 내가 어디로 이사 가는지 묻더니 그쪽 병원을 추천해줬다. 병원도 이제 지긋지긋한데 상담도 알아보라고 했다.
저번 주에 만난 뉴페이스를 다시 만나야 하나 혼자 고민해봤다. 지난 경험을 통해 그 사람의 배경이 동반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걸 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그려보면 에겐남이었으면 좋겠고, 경쟁적이거나 권위적인 사람은 나와 맞지 않을 것 같다. 대화가 잘 통하는 것도 중요하고 딩크였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모든 조건보다 먼저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누군가와 같이 살 자신이 있는가.
대답은 ‘노’였다.
아직 시작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관계가 진전된다면 언젠가는 이런 것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차라리 연애를 하지 않는 게 맞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만나고 싶은데 상대도 그럴지는 모른다. 그 역시 결혼적령기이고, 만약 결혼할 사람을 찾고 있다면 나는 알맞은 상대가 아니다.
자유로운 연애를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한쪽이 결국 결혼을 원하게 된다면 관계는 깨지기 마련이다. 누군가와 결혼했을 때 그 사람이 내게 기대할지도 모르는 바람직한 어머니상이나 아내상을 연기할 자신도 없다.
무엇보다 그와 대화했을 때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도 않았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보면 그냥 아는 동생으로 남겨두는 것이 맞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내가 원하는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부유하게 살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렵다. 누군가를 원하다가도 미래까지 그려보기 시작하면 결국 ‘그냥 이대로 있자’ 싶어진다. 그 사람이 내게 요구하는 것을 들어줄 자신도 없고, 나 역시 결혼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결혼은 때때로 기꺼이 상대를 위해 져줄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댄스학원에 갈 시간이 됐다. 춤을 추기 시작하자 머릿속을 차지하던 생각들이 사라졌고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집에 오는 길에는 90s 힙합을 들었다.
아까 병원에서 상실의 감정이 든다고 하자 쌤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차라리 미래를 생각하라고 했다. 병가 기간에 이직을 고려해보라고 했던 것도 이 시기가 너무 길어지면 그대로 멈춰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당분간은 좀 멈춰 있고 싶다.
물론 이것저것 시도는 해보고 있다. 글도 써보고, 음악도 하고, 새로운 가능성도 기웃거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모든 시도가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이었으면 하지는 않는다.
다시 로봇처럼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9-6 회사원으로 사는 건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지금 내가 원하는 미래는 앞으로 달려가는 삶이 아니라, 한동안 이렇게 멈춰 있어도 괜찮은 삶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