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 오이

오이 대신 망고 나무를 심어야 하나?

by백경화

어휴, 그 노므 텃밭. 정원을 꾸미는 사람들은 다들 한번씩은 들었을 "뭐뭐 심었어?" 여기서의 '뭐, 뭐'는 초화가 아니라 채소다. 먹을 거. 땅이 그렇게 넓은데 죄다 먹지도 못할 것만 심었냐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다. "먹을 거는 뭐, 아스파라거스랑 블루베리는 계속 있고, 감, 대추 있고, 복숭아도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 하나둘씩 나고 있고, 매실이 이번에 잘 됐으니 계속되겠지? 농장에서 버린 포도나무는 해걸이 한 번 하고 올해는 좋대. 산딸기는 징그럽게 번지고 있어."라고 해도 이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것이다. 정확히 그들이 원하는 답은 기본적으로 상추, 고추, 부추, 파, 호박이 나와줘야 하고, 고구마와 감자, 옥수수는 하나 정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을에는 김장을 대비해서 무랑 배추 정도도 심어야 하고, 내년 봄에 수확할 마늘 정도도 묻어 놔야 한다. 이 정도가 '뭐, 뭐'다. 이런 게 없으면 그 넓은 땅을 버리는 사람이 되는 거다. 그깟 꽃은 먹지도 못하고 고생만 죽어라 하는, "차라리 잔디나 깔아. 평상 놓고 고기나 구워 먹게."가 질문의 끝을 보는 운명이 된다. 그런데 내가 안 해 봤겠냐? 농사는 "뭐, 뭐 심었어?"로 묻기에는 너무 고난도다. 시골에 할머니들이 휘적휘적 다니면서 대충 심으면 뚝딱뚝딱 나오는 것 같지만 그 일이 얼마나 기술이 응축된 장인의 결과인지 첫 해에 해 보고 알았다. 고추는 병이 잘 든다. 약을 정말 많이 쳐야 한다. 호박은 생각 외로 수정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암꽃, 수꽃이 따로 있다는 것을 심어 보고 나서 알았다. 자리도 중요하다. 시골 어딘가에 버려진 땅 같은 곳에 관리도 안 된 것 같이 호박 덩굴이 막 휘감겨 있고, 호박이 덩실덩실 있는 건 그곳은 인간은 알 수 없는 호박만의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지 아무 데서나 막 잘 자라는 게 호박인 것은 아니었다. 한 번 자리 잡으면 없애는 게 더 힘든 들깨도 꽃을 피우고 씨가 맺히기까지는 뭔가 세심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 집에서도 빈 땅에서는 기어코 들깨가 자라나는데 깻잎조차 억세서 못 먹겠더라. 작정하고 심었을 때도 깨는 안 생기는 것 같던데. 수세미도 망했다. 내가 도대체 수확 시기도 모르겠고, 껍질을 벗겨내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조직 안에 있는 수백 개의 씨를 털어내는 것도 일이고, 그렇게 해서 얻게 된 수세미는 너무 연약해서 설거지 서너 번 하면 버려야 한다. 또, 망한 게 뭐가 있었지? 아! 상추. 맨날 상추를 먹는 것도 아니고 비 한 번 맞고 나면 상추가 배추가 되어 있고, 제때 안 따면 억세져서 못 먹는다. 여하튼 농사가 쉬운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세 놈을 심었다. 유딩들도 심어 키우는 방울토마토와 내가 좋아하는 최고의 여름 채소인 오이와 수확량이 너무 많아서 가지는 절대 안 심는다고 했다가 가지를 딱 한 주만 심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이는 다시는 안 심을 거다. 저것들을 5월 중순 경에 심고 6월 중순에 멀쩡한 오이 세 개를 수확하고 더 이상 오이는 나지 않는다. 글쎄 아마도 8월 중순이 지나서 폭염이 사라지고 나면 10월 초중순까지 한 번은 더 내주려나? 그래봤자 기껏 열 개도 안 되는 오이를 수확하겠다는 것은 노력에 비해 너무 무의미하다.

정말 오이에 온 정성을 다 했다. 덩굴손이 나오면 덩굴손이 자라나는데 힘을 쓰느라 오이를 못 키우니 오이 덩굴이 자라는 것 정도는 인간이 도와주면 오이를 키우는데 집중하게 될 거라는 얘기를 듣고 매일 덩굴손이 나올까 눈에 불을 켜고, 나온다 싶으면 잽싸게 잘라내고 덩굴을 설치한 그물망에 집게로 고정을 시켜 성장 방향을 유도했다. 처음에 노란 꽃이 폈을 때는 아직 뿌리 활착이 완전하지 않은 어린 모체가 자식이 생기면 계속 오이를 생산하지 못할 거라고 해서 초반에 피는 꽃들 몇 송이는 혹시라도 아기를 낳았을까 '고딩 엄빠는 안 돼!' 하는 마음으로 재깍재깍 떼줬다. 그리고 드디어 고대하던 오이가 새끼손톱만큼 자랐을 때는 얼마나 물 주기에 힘을 썼는지 모른다. 햇빛이 너무 셀 때 물을 주면 잎이 상하고, 뿌리가 물을 먹기 전에 증발이 먼저 될 거라는 우려로 어둠이 가시기가 무섭게 오이에게 물을 주러 나갔다, 매일매일. 그러면서 상한 잎이 있으면 따 주고, 몰래 생긴 덩굴손을 잘라주고, 길을 잘못 든 줄기를 방향을 유도하면서 정성을 다했단 말이다. 그렇게 얻은 나의 첫 어린 오이 두 개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과한 드레싱도 안 된다며 소금에만 절여서 수제 그릭 요거트랑 같이 온라인카지노로 정말 아껴 먹었다.

그러면서 나는 앞으로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개씩은 나올 오이를 생각하며 올여름은 아주 오이로 호사를 누릴 계획이 화려했단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의 초대를 받아서 그날은 물 주기를 좀 게을리했던 것 같은데 세상에나 새끼손톱 만한 아기 오이 네 개가 누렇게 변해 있어서 쓰린 마음을 부여잡고 손으로 네 개를 뜯어 냈었다. 이후 이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이 사건을 이웃에 공유했더니 오이는 아침, 저녁으로 물을 두 번 줘야 한다고! 아아아아아아 겨우 하루 물 주기를 게을리했던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려 하루 두 번 물을 주어야 하는데 꼴랑 하루 한 번 물을 줘 놓고서는 '한 번의 게으름'으로 아이 오이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나의 무지함을 얼마나 자바카라했는지 모른다. 나의 무지함이 죄 없는 아이 오이를 죽게 했어! 이후로 나는 나의 무지함이 낳은 죄를 사함 받고자 하루 두 번 온 정성을 다해서 오이에게 물을 진상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이님은 나의 죄를 사하여 줄 마음이 없으신지 자꾸만 아기들을 희생시키셨다. 어떻게 해도 나아지지 않는 진노의 마음을 도대체 인간 주제인 내가 어떻게 풀어드릴 수 있을는지.

오이야, 오이야, 제발 살아나줘를 간절히 바라며 지내는 어느 날 율을 산바카라시키던 남편이 소식 하나를 들려주기를 "율 산바카라하는 길에 있는 다리 근처에, 논 정리하고 오이밭으로 만든 데 있잖아. 거기 오이들도 싹 다 죽었던데. 다 누래." 그으래? 그분들도 논농사만 짓다가 처음 짓는 오이 농사라 관수를 잘 안 했나? 왜 그러셨지? 나야 농사 무식 쟁이니까 그렇다 치고. 아님 오이에 전염병이 돌았나? 그러다 며칠 후 또 중요한 광경을 목격했는데 세상에나 출퇴근하는 길에 있는 오이밭에 무심코 눈이 갔는데 오이가 정말 싹 다 죽었다. 이것은 오이 무덤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단 말이다. 충격적인 사건. 멀쩡한 건 금속의 오이 지지대 뿐 그 위에는 누렇게 말라 붙은 오이 줄기들이 보기에도 불쌍하게 다 널려 있었단 말이다. 그것에 비하면 우리 오이는 애기만 계속 죽고 있을 뿐이지 줄기도 굵고, 색도 선명하고, 잎도 좋고 그냥 한 마디로 자유 부인. 태어난 이상 나를 잘 보필해 주는 무지한 인간이 있으니 나는 삶을 즐기겠다는 자유 오이가 우리 집에 위풍당당하게 생존하고 계셨던 것이다.

오이 영아 살해는 나의 무지함에서 비롯한 잘못된 행위가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알아보니 오이는 여름작물이긴 하지만 40도가 육박한 고온의 환경에서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심지어 장마 전 한참을 가뭄 속에서 지냈는데 오이가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는 얘기. 그때서야 기억이 났다. 집에서 오이가 생산되지 않으니 열심히 마트에서 오이를 수급해 준 남편 왈, "마트에 오이가 귀해. 그리고 꽤 비싸네." 허허허. 내가 내 집 오이에 꽂혀서 귀를 닫고, 눈을 감은 채로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되지도 않는 헛일을 하고 있었구나. 오호, 통제라. 이후 열흘 정도의 장마를 끝내고 스스로 오이임을 포기한 아기들이 흡사 에어리언 같은 모습으로 내 집에 나타났다. 눈물이 난다. 죽어라 고생하며 살아난 너도, 무지에 무지가 더해 물만 죽어라 퍼 나르던 나도 고생했다. 이 망할 놈의 오이

우리의 이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란히 이웃해 있는 방울토마토와 가지는 장마가 끝나고 나서부터 왕성하게 알록달록한 아이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오이로 다친 마음을 방토와 가지로 달래는 요즘. 방토는 이웃집에 놀러 온 어린 손자 녀석에게 꺼드럭거리며 따 줬더니 엄청 좋아하고, 가지는 대풍년이라 매일 가지 메뉴를 검색하면서 이것저것 해 먹는 재미로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고 있다. 그래도 매일 오이에 물을 준다. 혹시라도 몰라 추워지기 전에 애가 심기일전 해서 올해의 마지막 성과를 보일지도. 미련을 버릴 수가 없다. 아니, 너는 심기일전하여 올해의 마지막 성과를 꼭 보여야 한다. 왜냐면 너에게 내년은 없을 거거든. 오이 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