댁의 정원은 안녕하신가요?
한낮 기온이 40도에 육박한다는 뉴스를 보고 미친 여름이라는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동네 이웃들과는 절기 대로 중복이 지나니 한낮이 아니고서는 바람이 시원하기까지 하다면서 이렇게 여름이 가는 거냐며 설레발도 쳤다. 비록 장맛비에 목수국 가지가 큰 얼굴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버리긴 했지만 장마도 길지 않게 지나간 것 같고, 무엇보다도 장마 전후로 바랭이풀을 성질대로 정리하고 났더니 오히려 정원에 바람길이 생겨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이제 대충 한 달만 버티면 여름도 지나갈 거라는 해맑은 기대가 가득 차던 7월 말.
그때부터다. 내가 또 순진했구나. 그렇게 몇십 년을 당하고서도 또 당했구나. 뇌를 녹여버릴 것 같은 무더위는 7월 말부터. 정확히 우리 동네는 7월 31일부터 시작되었다. 일기 예보에 구름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샛노란 색 해만 아무 장식도 없이 둥실하게 떠 있는 그림이 계속 됐다. 일기 예보 창에 뜬 장식이 하나도 없는, 심플 그 자체인 노랗고 동그란 해는 일몰 시간 때만 모양이 바뀔 뿐이었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는 어떤 수식어도 어울리지 않는 "뜨거워!"로 설명이 끝난다. 불타는 태양 아래서 고군분투 중인 초화들에게 물을 줘야 하는데 오전 중인데도 불구하고 창밖으로만 봐도 위력이 대단한 태양에 미리 기가 죽어버려서 아무도 듣지 않겠지만 굳게 다짐을 했다. "지금 나가서 물을 주면 애들은 살겠지만 나는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땡볕에 애들의 상태를 보지 않을 수는 없으니 일단 보기만 하겠다."며 선크림과 마스크와 모자와 팔토시로 무장을 하고 모기 기피제까지 기침이 나올 정도로 뿌려댄 후(사실 이런 더위에는 모기도 없다. 장구벌레가 다 쪄 죽었을 게 뻔하다.) 한 바퀴를 둘러보는데 올해 심은 오이풀 한 줄기가 덜 익어 색이 오르지 않은 꽃봉오리가 힘에 겨운지 땅을 향해 축 쳐져 있다. "미안해, 아가. 지금은 안 돼. 조금 더 버텨 물은 해가 넘어간 후 그늘이 지면 그때 줄게. 지금 주면 물방울이 너를 태울지도 몰라. 물론 나도."
엄청난 자외선에 기분이 좋은 건 리톱스 화분뿐이다. 근 2주에 걸친 장마 기간 동안 배 부르게 햇빛을 먹지 못한 리톱스 4형제 만이 그동안 굶었던 자외선을 배부르게 먹어 재끼면서 이 힘으로 가을에 꽃을 피울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중복이 지나면서 바람이 선선해졌어 올여름은 순하게 지나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표현했을 때 할미꽃이 제일 예쁘다는 엄마는 나이 오십에도 철이 덜 든 딸네미의 발언에 조용히 한 마디를 더 하셨다. "곡식을 익혀야 하는데 해가 순하게 넘어가겠니?" 맞다.
어느 7월 말 일 즈음, 율 산바카라길이 있는 논길을 지나면서 달콤하고 구수한 누룽지 사탕 냄새가 진하게 났었다. 아직 통통하게 오른 벼 알맹이가 보이진 않았지만 이 정도로 단 냄새가 나는 걸 보면 이글거리는 여름의 태양이 제 할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루, 이틀 후인가 다른 동네의 논을 보니 통통하게 익은 벼 알갱이들이 튼실하게 일렬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걸 보면서 곡식을 키우는 태양의 엄청난 노동력을 확인했다. 그날이 8월 1일. 그리고 그날 오후 남편이 혹시나 하고 확인 한 우리 집 납작 복숭아는 색을 얼추 올린 것 같은데 아직은 충분히 여물지 않았다고 얘기해 주었다. 이어 오늘 오전에 직접 확인해 보니 곡식을 익히고, 열매에 단맛을 들게 하는 태양의 수고가 한참은 더 필요한 때구나 싶었다.
아, 나는 죽었다. 이제 한, 두 주 동안의 삶의 목표는 다른 것도 없이 무사히 무더위에서 생존하는 것 밖에 없구나. 더위에 입맛이 떨어지기도 했고, 한낮에는 실내에서 에어컨에 의지하며 낮잠을 달게 자고, 찜해 둔 넷플렉스 시리즈를 도장 깨듯 시청하고, 현재 읽고 있는 바카라은 '오디세이아'와 '실마릴리온'으로 현실 세계에서 벗어난 초현실적 공간으로 피서 중이다.
태양의 못 말리는 근로 의욕으로 정원은 불타고 있다. 배롱나무 꽃으로, 오이풀로, 루드베키아로, 맥문동 꽃으로, 늦게 개화하는 꽃잎이 두꺼운 트위스트 셀렉트로, 에키네시아 패럿으로 짙고, 강렬한 색깔로 정원은 불타고 있다. 그리고 꼬독꼬독하게 말라가는 중인 우메보시와 에어컨을 빵빵하게 돌릴 수 있도록 역시 열일 중인 태양광 패널. 이러고 보면 광폭 중인 태양도 일말에 배려심 정도는 있으신 듯.
폭염 중에 댁에 정원은 안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