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계절 사이

누워버린 샤스타데이지를 자르지 않는 사정.

by백경화

율과 주로 다니는 산바카라길은 논을 끼고 있는 좁은 농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 마을에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많아서 산바카라로는 재밌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하긴 어떤 길이든 산바카라하는데 100% 만족스러운 길이 없긴 하지. 재밌는 길이라고 하자. 산바카라의 재미를 주는 큰 요인은 곳곳에 피어있는 야생화들과 주민들이 조성해 놓은 작은 공원에 핀 계절의 꽃들. 그리고 언제부터 있었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아름드리나무들과 오래된 벚나무 꽃길 등이다. 한마디로 아름다운 길을 산바카라하기 때문에 재밌다. 아마 많은 들꽃들과 나무들이 내뿜는 냄새들을 맡느라 율도 산바카라이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산바카라길에서 가장 마음에 들고 우리 집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꽃이 샤스타데이지였다. 어느 해인가 개천을 따라 이어진 진 길 가득히 샤스타데이지가 길게 띠를 두른 듯 풍성히 피어있는 길을 걷는데 그 풍경이 정말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햇살은 강한 듯 하지만 아직은 덥지 않은 계절에 하얗게 떠서 하늘거리는 흰꽃 무리들은 시골길의 서정성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문득 가벼운 흰꽃의 무리가 내 정원의 입구를 밝혀준다면 얼마나 근사할지를 상상하며 바로 파종을 했다. 예쁘고 풍성한 모습에 반해 파종을 했다가 엄청난 번식력으로 결국에는 다 파내야 한다는 정원 선배들의 조언을 충분히 들은 뒤 한 두 해 보고 파버릴 생각으로 거침없이 질러버렸다. 주정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동선에 따라 세 군데에 파종했다. 그다음 해에는 딱 생각한 대로 예쁘게 피었고, 기대한 것보다 만족감도 컸다. 심지어 꽃이 지고 난 뒤에도 이파리들이 낮고 넓지만 단정하게 살아주니 잡초도 막아주고 일석이조로 너무 좋았다. 그리고 올해 정원의 한 구석, 손이 잘 안 가서 한 번 갈 때마다 잡초만 한참 뽑고 와야 하는 공간에 샤스타데이지를 분주해서 심어 놓으니 어둡고 구석진 공간이 밝아지고, 크게 손이 안 가도 꾸준히 꽃을 내주는 효자 화초가 됐다.

이런 애에게도 큰 단점이 하나 있으니 이 아이가 피는 계절이 계절이니 만큼 변덕스러운 날씨의 변화를 온몸으로 맞고 견뎌야 하는 숙명이랄까? 게다가 동네의 위치가 바람이 많이 불고, 급작스러운 소나기도 잦고, 일교차도 큰 편이라 시련을 많이 겪으며 버텨내야 한다는 혹독한 숙명. 인간도 세월을 정통으로 맞으면 세월을 비껴간 사람보다 노쇠해 보이듯이 이 아이도 그렇다. 일부가 활짝 폈다 싶으면 비바람에 휙 넘어갔다가 바로 해가 반짝이면 쑤욱 올라오기를 반복하고, 며칠을 그렇게 견딘 무리와 새로 봉오리가 올라온 무리가 묘하게 겹치면서 정리하기엔 아깝고, 그냥 두기엔 지저분한 모양새가 계절 내내 지속된다. 처음에는 일기예보를 보고 묶어두기도 했는데 묶었다가 풀었을 때도 그냥 두었을 때랑 큰 차이가 없어 '그래, 이게 니 운명인가 보다. 이래저래 뿌리내린 땅에 적응하고 살자' 싶은 생각으로 해를 난다.

단정하게 예쁘게 잘 핀 모습은 며칠, 그리고 오랫동안 고단한 모습의 지속. 자양강장제라도 부어 줘야 하나 싶기도 한 모습에 가끔 새콤이가 샤스타데이지 주변 흙을 파고 오줌이라도 싸는 모습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콤아, 걔도 힘들게 사는 애야. 굳이 그래야겠니? 데이지, 힘 내!"하고 응원을 하게 된다.

시간을 더해 점점 포기가 벌어지고 누렇게 시든 꽃을 정리하는 것도 귀찮아질 무렵 이젠 싹둑 정리를 하고 내년을 기다려볼까 하다가도 하얗게 동동 뜬 꽃잎들이 만들어내는 정원의 공간감은 또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소실점 효과라고 해야 하나? 그저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는 공간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이른 봄꽃들은 지고, 아직 여름 꽃들이 제 빛깔을 내지 못하는 그 애매한 때에 긴장감 없이 성글게 올라온 그 모습이 정원 전체를 더 여유롭게 만들어 주는 기분이랄까? 어느 집에나 있는 싱겁기 그지없는 삼촌이 평소에는 구박만 받다가 어린 조카들이 잔뜩 모이는 정신없는 명절에 어떤 어른도 할 수 없는 애들의 질서 반장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장면에서는 빠짐없이 나오는 칭찬인 듯, 칭찬이 아닌 듯한 그런 소감. "쟤가 어릴 때는 아주 똘똘하고 이뻤어. 크면서 이상해져서 그렇지. 곧 철이 들거야."

올해 산바카라길에서는 개그 캐릭터의 샤스타데이지를 만나기도 했다. 엉뚱한 모습이 너무 웃겨서 며칠 동안 볼 때마다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계절이 지나고 웃긴 샤스타데이지도 씨앗이 잘 여문 모습을 봤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내년에도 어떤 모습으로든 기특하고 예쁜 모습으로 다시 피어나겠지. 올해도 내 정원의 샤스타데이지는 마지막 한 송이까지 알뜰하게 피었다. 진한 초록이 가득한 정원에 가볍게 툭 올라오는 하얀 꽃송이가 7월 초까지 정원을 시원하게 만들어 줬다. 마지막 한 송이 이후에도 튼튼한 이파리들은 잡초가 무단 침입 하지 못하게 경비 업무도 충실히 해 주고 있다. 내년에는 분주를 해야지. 정원의 숨겨진 곳곳에서 작은 무리들이 툭툭 하얀 구름을 만들어 낼 새로운 장면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