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판왕이 나타났다
“짝사랑은 자기 사랑이다”
대학교 때 한 교수님이 강의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문장은 길을 걷다가도 가끔씩 생각나곤 했다.
나는 짝사랑을 꽤 많이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마음이 바빠졌다. 내 마음을 알아챌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끝내 알아채지 못하면 서운했다. 알아채면 어떡하지 싶으면서도 알아채기를 바랐다. 먼저 좋아한다고 말할 용기는 막상 없으면서도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짝사랑에도 나름의 기술이 필요했다. 마음을 너무 많이 표현하면 부담스러워 도망갈 수 있으니 적당히 조절해야 했다.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물러서고, 들키고 싶으면서도 들키지 않기를 바랐다. 좋아하는 마음보다 그 마음을 어떻게 들키지 않을지가 더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내가 마흔이 넘어 뜻밖의 짝사랑 상대를 만났다.
바로 내 딸이다.
예전에는 누군가를 좋아하면서도 마음을 얼마나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다. 너무 많이 주면 부담스러워 달아날까 봐. 그런데 내 딸에겐 그런 걱정이 없다. 아무리 주고 또 주고 퍼줘도 도망가지 않는다. 내 마음을 들킬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너무 많이 좋아하는 티를 내면 어쩌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얼마나 좋아하든, 얼마나 표현하든 아이는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 이번에는 더더욱 마음을 아낄 이유가 없다.
밥을 먹이고, 바카라을 읽어주고, 같이 놀고, 좋은 것을 보여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예쁘다 귀엽다 사랑한다‘ 말해준다. 이미 많이 해준 것 같은데도 더 해주고 싶다. 내가 가진 것을 더 많이 주고 싶다.
물론 아이도 가끔은 사랑을 돌려준다. 두 팔로 가장 큰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자기 마음의 크기를 보여준다. 그럴 때면 짝사랑도 드디어 끝나는 건가 싶다.
“연우는 엄마 아빠를 이마안큼 사랑해요!”
‘짝사랑은 자기 사랑이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사실 지금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짐작해 보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그 사람을 향한 마음만큼이나 '좋아하는 나'를 향한 마음도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관심받고 싶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의 끝에는 늘 내가 있었다.
그런데 아이를 향한 마음은 조금 다르다. 나는 아이에게 사랑받는 엄마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아이가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걸 느끼며 자라기를 바란다. 언젠가 내가 해준 일들을 기억하지 못해도 좋다. 그저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감각 하나를 품고 자기 삶을 살아가면 된다.
사랑을 많이 주고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고, 오히려 더 주고 싶어지는 사랑이 있다는 것.
그러고 보면 짝사랑은 여전히 자기 사랑이 맞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번에는 그 안에 아이가 들어와 있을 뿐.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양의 짝사랑이 시작된 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