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어도 더위는 식을 줄 모른다.
한여름 낮이야 더운 게 당연하다지만, 밤 10시가 넘어가면 대기도 대지도 좀 식어야 염치가 있는 것 아닌가.
날씨가 염치가 없다. 아니, 이렇게까지 지구 온난화를 가속시킨 인간들이 지구에게,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염치가 없다. 날씨는 요지부동, 며칠째 이어지는 열대야에 세상도 내 머릿속도 푹푹 익어가고 있다.
그 난리통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었다.
나는 둘째 아들을 장가보냈고,
친구는 아프리카를 다녀왔으며,
선배는 이탈리아 돌로미테의 능선을 걷고 돌아왔다.
듣고 싶은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한 보따리.
어찌 만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톡방에 바로 번개를 쳤다.
"8월 6일 저녁, 따봉시래기!"
오늘 저녁, 좋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돌판에 구운 차돌박이와 자박하게 익은 시래기를 싸 먹으며, 가슴속까지 뻥 뚫리는 시원한 맥주를 마실 생각에 지난 며칠 동안 금주를 하였다. 기분 좋은 기다림이었다.
하지만
세종에서 온 선배는 할리 데이비슨을 끌고 나타났고,
친구는 날이 너무 덥다며 차를 가져왔다.
또 다른 친구는 속이 불편해 술을 못 마신단다.
‘아, 이게 아닌데…….’
맥주를 아주 좋아하는 어떤 이는 일부러 한 달씩 금주를 한다고 했다. 한 달 동안 참았다가 마시는 그 첫 잔의 강렬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란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낭만에 깊이 공감했었다. 나도 며칠 동안 겨우 참아낸 그 완벽한 첫 잔의 순간을 오늘 그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는데, 결국 혼자 맥주잔을 들게 되었다.(그나마 속이 불편한 친구가 겨우 장단을 맞춰 맥주 몇 잔을 함께 해 주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노릇한 차돌박이와 구수한 시래기가 있었고,
아프리카를 누비던 엉덩이가 일품인 얼룩말도 있었고,
돌로미테 바위 사이에 피어난 에델바이스가 식탁 위에 피어났다.
홀로 비우는 맥주잔이었지만, 그 신나는 수다 덕분에 마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밤 9시가 넘어 가게 문을 열고 나왔지만, 지상의 더운 열기는 여전히 묵직하게 머물러 있었다.
모두를 배웅하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 실로 오랜만에 밤거리를 한가로이 걸어본다.
길을 걸으며 습관처럼 바닥을 두리번거린다.
‘어디 보자, 오늘은 누구 키가 더 크려나?’
나를 따라오는 또 하나의 나, 나의 그림자다. 나의 그, 임자다!
빛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내 앞이나 뒤에 차알싹 붙어 걸어가는 녀석.
내가 취하는 포즈대로, 내가 휘청이는 대로 함께 흔들리는 나의 가장 오래된 동반자.
생각해 보니 그림자는 참 오묘하다. 난 걸으며 그림자에 대해 세 가지 생각을 정리했다.
1.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화려한 성공이나 환호 뒤에 찾아오는 외로움의 깊이처럼.
2. 분명 눈에 보이고 나와 똑같이 움직이지만, 손으로 잡을 수 없고 무게조차 없다. 때로는 나보다 더 길게 늘어지며 커지기도 한다. 형태는 있지만 무게는 없는 존재
3. 요즘처럼 뜨거운 여름날에는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 그늘이 더없이 고맙다. 뙤약볕에 지친 이들에게 기꺼이 제 그림자를 내어주는 가로수처럼, 누군가에게 제 그림자로 그늘을 만들어준다는 건 참 다정한 일이다.
내 그림자와 함께 여름 밤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몇 년 전에 봤던 아주 인상 깊었던 영화 한 편이 생각났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
그 영화에서 '코모레비(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라는 단어를 배우고, 너무나 좋아서 한동안 내 카톡의 상태 메세지로 설정하였었다. 주인공 히라야마가 나뭇잎 사이로 흔들리는 빛과 그림자(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그로 인해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카메라로 찍던 장면. 그 시각, 그 순간에만 존재하며 똑같은 모양으로 다시 반복되지 않는 빛과 그림자.
히라야마는 매일 필름 카메라로 나무와 그림자를 찍고, 밤마다 흑백 그림자가 흔들리는 꿈을 꾼다. 반복적이고 지루해 보이는 일상이 사실은 매 순간 새로움과 미학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었다.
영화 후반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선술집 여주인의 전남편과 밤거리에서 만나 나눈 두 어른 남자의 그림자 놀이 장면은 정말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였다.
"그림자와 그림자가 겹치면 더 어두워질까요?"
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두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서로의 그림자를 겹쳐 보며 발걸음을 옮긴다.
타인에게 자신의 상처나 어둠을 내보이면 그 어둠이 더 짙어질까 두려워 고립된 삶을 살던 히라야마는, 그림자가 겹쳐진다고 해서 어둠이 두 배로 늘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즉, 삶의 비극이나 슬픔, 외로움 역시 빛이 존재하기에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그림자일 뿐이며, 이를 거부하지 않고 껴안을 때 삶이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빛과 그림자의 공존!
기쁨과 슬픔의 공존!
밤바람에 휘청이며 나를 따라오는 그림자.
긴 세월을 군소리 없이 함께 걸어준 나의 오래된 동행.
이 녀석을 끌고
에어컨 시원하게 틀어놓고 기다리고 있을
내 삶의 또 다른 소중한 동반자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발걸음이 가볍다.
외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