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꿈을 꾸었다.
밤새 거친 바람과 성난 파도를 온 힘으로 헤쳐 나간 항해의 피로 탓이다.
어제 오후,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를 봤다. 역시나 감독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고전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각색과 연출, 배우들의 열연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스크린 속 배우들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그 아득한 옛 시절 속으로 걸어 들어가 함께 칼을 겨누고, 삐걱거리는 노를 젓고 있었다. 오디세우스의 집으로 향하는 길고도 고된 귀향길을 함께 하고 온 기분이다.
영화관을 나서며 가슴에 남은 것은
괴물과의 사투나 화려한 전투 장면이 아니었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 나는 지금 잘 돌아가고 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뿐이었다.
놀런 감독은 거대한 스크린과 압도적인 영상미로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대서사시를 완벽하게 직조해 냈다. 사운드가 훌륭한 돌비 영화관을 가득 채운 관객들 틈에서, 귀와 눈이 여린 나는 그 거대한 감각적 자극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밤새 이어진 꿈속의 항해로 고스란히 스며들었던 것이다.
영화를 볼 때, 나는 늘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는 편이다. 스포일러를 극혐 하는 이들도 많지만, 충분히 알고 볼 때 감동의 깊이가 더 깊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극장 안팎으로 영화의 여운을 곱씹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기다렸던 장면은 기약 없는 남편을 향한 페넬로페의 기다림, 그리고 거침없는 유혹의 목소리 세이렌과의 만남이었다. 두 장면도 매우 훌륭했지만 감독은 원작에는 없는 시논을 등장시켜 자신의 계략 때문에 죽은 하급 병사의 죽음을 통해 죄바카라감을 감당하게 한다. 그리고 진실을 피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몸을 기둥에 묶고 세이렌의 노래를 고통스럽게 듣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에우리로코스가 오디세우스에게 뭘 들었냐고 묻자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과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던 모든 것"
이라고 말한다. 이게 무슨 의미지? 그리고 나중에 이렇게도 말한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이미 갖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이미 가진 것의 소중함을 너무 늦게 깨닫기에 불행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 기나긴 고난 끝에,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죽음의 문턱과 유혹, 두려움과 죄바카라감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아내 페넬로페와 소중한 아들 텔레마코스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한 사람이 자기 삶의 자리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성공을 향해, 혹은 저 멀리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헤매며 떠날지라도,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가장 평범하고 따스한 나의 일상이라는 것을 영화는 전해준다.
오래전, 매일같이 반복되는 학교 현장이 단조롭게 느껴져 새로운 환경에서의 배움을 갈구하며 특별 연수를 신청한 적이 있었다. 감사하게도 대상자로 선정되어 6개월간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 연구실에서 머물 수 있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출퇴근을 반복하던 워킹맘의 일상을 벗어나, 파릇파릇하고 열정 넘치는 젊은 석·박사 연구원들 속에서 그들의 생기와 젊음이 부러웠었다. 이미 무언가 정해진 궤도를 달리는 듯했던 변화 없는 내 삶과 달리, 그들은 끊임없이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뜻밖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그들의 진짜 꿈과 남모를 불안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미래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았다.
1. 훌륭한 교수가 되거나 임용고시에 합격해 당당히 교단에 서는 것.
2. 마음이 잘 맞는 짝을 만나 온기 가득한 가정을 꾸리는 것.
3. 아이를 낳아 세상의 지혜를 가르치며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부모가 되는 것.
4. 땀 흘려 일해 가족이 편히 쉴 수 있는 소박한 내 집을 갖는 것.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연구하고 눈을 반짝이며 꿈꾸는 20년 뒤의 그들의 미래는 바로 뭔가 부족하다 느끼며 그들 앞에 있는 당시의 나였다.
그 시절의 나는 늘 삶이 허전하고 채워지지 않아 방황하던 나이였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삶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오디세우스다.
저마다의 모진 바람을 견디며,
저마다의 고향을 향해
묵묵히 살아내고 있다.
오늘도 모든 오디세우스들이여,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