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퇴사 후 산티아고로 떠난 숨고르기 청년의 순례길 #15
순례길의 많고 많은 곳 중에서 하필 부르고스를 지나면서부터 동행이 흩어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부르고스 도시를 벗어나는 순간 순례객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메세타 평원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메세타 평원은 높낮이가 크게 바뀌는 지형이 없어서 편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마을 간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데다가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평야를 한참 걸어야 하는 곳이다. 지루한 걸음을 이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버스를 타기도 하고, 절반을 지나는 시점에 집으로 돌아갈 날짜와 대조해 보고 속도를 올리기도 한다. 점차 늘어나는 거리에 더 쉬었다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한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각자가 경험하는 순례길은 천차만별이다.
순례길을 걸으며 자주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과연 다른 이의 순레길은 어떠할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초반 2주 동안은 누구보다 아침 일찍 나왔기 때문에 항상 고요하고 깜깜한 마을을 볼 수 있었고,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앞으로 걸어가며 풀잎마다 반짝이는 빛깔을 감상할 수 있었다. 대신 나는 오후의 따가운 햇빛 아래서 땀을 흘린 적이 거의 없었고, 걷는 중에 마을에 들러 점심을 먹은 적도 거의 없었다. 내가 만났던 한 순례객은 밤늦게 알베르게에 도착하곤 했는데, 그 이유를 물어보니 지나가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 자리에 멈춰 한참을 감상하고 집에도 들어가곤 한단다. 한 번은 포도밭 옆을 지나다 와인 맛이 궁금해 와이너리 집에 문을 두드리고 두 시간 동안 와인 빚는 과정을 보고 체험했다고 했다. 시간에 쫓겨 빨리 그날 숙소를 향해 걷는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여유로운 순례길이었다.
부르고스에서 새로운 신발을 사기도 했고, 어떻게든 다음 숙소가 차기 전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씩 벗어난 탓인지 아침에 일어나는 시각이 점차 늦어졌다. 불과 한두 시간 늦게 출발했을 뿐인데, 마주치는 사람들은 정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걷고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모두가 부르고스에서 출발한 순례객은 아닐까 했는데, 나중에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물으니 생장에서 나와 다른 날 출발했던 사람들이었다. 한국인 누나 S를 제외한 모든 동행을 떠나보낸 시점에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걷는 것은 마치 생장에서 새로 출발할 때의 느낌과도 묘하게 닮아있었다. 메세타 평원은 이전의 순례길과는 꽤나 다른 길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메세타 평원 그 자체도 있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걸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모두가 새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메세타 평원에 들어서면서부터 혼자 걷게 되었다. 한국인 S는 걸음이 모든 순례객 중에서도 가장 빠른 축에 속했기 때문에 같이 걸을 수 없었고, 더구나 내가 아침에 늦게 일어나게 되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부르고스 이전까지는 아무리 사람이 없더라도 10분, 길어도 30분 이내에 한 명쯤은 보곤 했었는데, 메세타 평원에서는 한두 시간을 넘게 주위에 아무도 없이 혼자 걸었던 적도 있었다. 까리온 데 로스콘데스에서 테라디요스 데 템플라리스로 가는 평원은 그중에서도 가장 길게 혼자 걸었었다. 세 시간 동안 걷는 동안 주위에 아무 풍경도 바뀌는 것 없이 평야를 걸었다. 저 멀리 지평선까지 보일 만큼 길고 넓은 평야였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홀로 된 것이다.
이미 부르고스를 떠나면서부터 며칠 동안 혼자 걸었으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종일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걷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침에 출발한 뒤로 마을은 서너 시간은 걸어야 처음으로 나오기 때문에 끼니를 해결하려면 미리 음식을 싸가야 했고, 중간에 화장실도 찾을 수 없었다. 오로지 앞만 보고 걸을 뿐이었다. 양옆을 둘러보아도 바뀌지 않는 풍경에 더 이상 그곳을 즐기기는 어려웠다. 차라리 부르고스에서 버스를 타고 다음 대도시인 레온으로 건너뛰는 것이 나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메세타 평원을 혼자 걷다 보면 두 가지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다. 첫째로는 내가 걷는 이 길이 맞는 길일까, 하는 의문이다. 길고 넓고 아무것도 없는, 거기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평야는 혹시나 내가 잘못된 길로 든 것은 아닐지 걱정에 빠지게 했다. 실제로 부르고스 이전까지도 두세 번은 길을 잃어 한 시간은 족히 돌아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저 앞으로만 계속 걸어가는 코스가 낯설기 때문에 생긴 두려움이었다.
두 번째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설사 오늘은 내가 완주하더라도 내일도, 모레도 똑같이 이렇게 길고 따분한 길이 이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비싼 돈을 들여온 이 순례길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무언가를 얻어가야만 할 것 같은데, 이 지루한 메세타 평원에서는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더욱이 이런 평야가 얼마나 더 이어질지 감도 오지 않는 게 나를 더 고통스럽게 했다. 그러다 이 평원은 이전 순례길과는 다르게 무언가를 얻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반겨주는 사람들과 맛있는 저녁 식탁, 매일 달라지는 지형 속에서 주어지는 깨달음은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들이 없음에도 이 길을 걸을 수 있느냐는 신의 시험과도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반드시 권태기가 오기 마련이다. 이게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주지? 아무런 흥미도 보람도 주지 않는 일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은 포기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삶의 모든 순간이 전부 무언가를 얻는 일로만 가득할 수는 없는 법이다. 때로는 비워내는 법도 배워야 하고,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채로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렇게 지겹고 따분한 길을 다 걷고 나면 또 다른 쉼이 주어지고 새로운 기쁨이 솟아나는 법이니까.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상실하면 그대로 목적마저 잃어버리는 게 항상 나의 패턴이었다. 그러나 그날 메세타 평원은 때로는 의미가 없이 걷는 것 또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언제까지 이 평범한 일상이 이어질지 알지는 못하지만 그저 한 발짝을 더 내디뎌보는 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여섯 시간을 넘게 걸어서 나는 레디고스에 도착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앉아서 쉴 곳을 찾았다. 오늘의 목적지인 테라디요스 데 템플라리오스까지는 불과 30분 거리밖에 남지 않았지만 앉아서 쉴 곳도 없는 평원을 한참 걷다 보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다행히 마을을 빠져나가기 직전 누군가 아름답게 관리를 하고 있는 듯한 풀밭과 벤치가 보였다. 스프링클러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사방을 적시고 있었고, 그 앞 벤치에 앉으니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한 오 분 정도 앉아있었을까 슬슬 발목 근육이 다시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마침 어제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던 미국인 K가 보였다.
K는 사실 이틀 전에 처음 만난 사이인데, 카스트로헤리스 마을에 슈퍼를 찾아 헤매는 나에게 혹시 한국인이냐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백인이 한국인을 바로 알아본 것이 신기해 어찌 알았냐고 하니 어릴 적에 이태원에 오랫동안 살아서 한국 문화에 익숙하단다. 그렇게 잠시 스쳐가는 인연일 줄 알았는데 어제는 같은 숙소에 머물면서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더 깊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K는 미국인이지만 현재는 영국에서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고 현재는 봄방학 기간이라 2주간 시간을 내어 짧게 걷는 중이라고 했다. 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짧게 구간을 나누어서 완주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K가 저 멀리서부터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K도 분명 여기서 쉬어갈 텐데 그렇게 되면 대화가 길어지고 더 오래 쉬어야 할 것이 뻔했다. 시계는 벌써 세시를 넘겨 예상 시각을 넘겼고, 빨리 숙소에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에 인사만 얼른 하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게 신의 한 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숙소에 들어와 잽싸게 샤워를 하고 땀에 젖은 옷을 모아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이곳 알베르게는 마치 중세시대의 우물가 빨래터를 보는 것처럼 개수대 디자인이 신기하게 생겼다. 물을 아껴 사용하라는 경고문을 보고는 바구니에 물을 담아 한번에 손으로 꾹꾹 누르고 비비며 손빨래를 했다. 하루의 피로를 손 끝으로 하나하나 씻는 손빨래야말로 이 순례길 하루 중 가장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이 날은 손빨래를 하고 나니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잠시 개이더니 쨍쨍 햇빛이 내리쬈다. 이 정도 날씨라면 서너 시간 만에 금방 마를 듯 보였다.
알베르게 정원 구석에 늘어진 빨랫대 위에 옷과 양말을 널어놓고 뒤를 돌아보니 K가 보였다. 카페를 겸하고 있는 알베르게에서 오렌지 주스를 시켜 마시고 있었다. 나는 반갑게 또 만났다며 오늘 이곳에서 묵느냐고 물었더니 K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알고 보니 K가 도착했을 때에는 숙소가 꽉 차서 더 이상 체크인이 불가능하다고 했단다. 이 마을에는 알베르게가 여기 한 곳뿐이어서 하는 수 없이 다음 마을인 모라티노스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간단다. 이미 네시가 다되어가는데 다섯 시에 숙소에 도착하면 씻고 빨래할 시간도 부족할 터였다. 다섯 시에 빨래를 널면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이 얼마 없어 빨래가 다음 날 아침까지 마르지 않을 텐데, 하는 걱정도 들었다. 이미 지쳐 보이는 K에게 조금만 더 힘내보자며 응원을 담아 이야기했다. K는 괜찮다며 애써 미소를 짓고는 알베르게를 떠났고, 그게 내가 K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