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성과를 내는 자, 자리를 빼앗는 자

전공은 환불이 안 되나요: N회차 이직과 비전공자의 발버둥

byNoA

"형, O대리요. 아직도 잘 다니고 있다던데요?"

후배와의 전화 통화 중이었다. 그의 말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참 대단하다, 대단해."

그 통화로, 몇 년 전 식품회사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슬롯는 정글이자 냉혹한 야생이다. 주변 모두가 맹수처럼 나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다. 가장 화사한 미소를 띠고 커피를 건네던 옆자리 동료가, 내 등 뒤에 가장 날카로운 비수를 꽂을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곳이 바로 회사다. 그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이고, 살아남기 위한 방법일지라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참 기분 나쁠 수 밖에 없다. 당하는 놈이 바보인 세상이다.


식품 회사에 온라인 마케팅 팀장으로 일 했던 1년은 그야말로 내 영혼을 갈아 넣은 사투였다. B2B 납품에만 기대어 온라인 매출이라곤 월 30만 원 수준으로 전무했던 회사였다. 주말도 없이 상세페이지를 갈아엎고 판로를 뚫었다. 피나는 노력 끝에 1년 만에 온라인 매출을 월 1억 원대로 끌어올렸다. 눈에 보이는 압도적인 매출이 있으니, 재계약 테이블에서 연봉 인상과 매출 인센티브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었다. 내 통장에 찍힌 두둑한 성과급을 보며, 비전공자였던 나의 성공을 자축하며, 실력을 인정 받음에 자존감이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본사와 마케팅팀 사무실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었다. 가끔 본사로 회의를 갈 때면 싹싹하게 인사를 건네오던 입사 5년 차 O대리가 있었다. 그녀는 특유의 서글서글한 눈웃음과 친화력으로 임원진과 대표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팀장님, 팀장님 오기 전에도 저희가 온라인 쪽 해보려다 다 실패했었거든요. 어떻게 그렇게 매출을 빵빵 터뜨리세요? 정말 대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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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게 커피를 건네며 마케팅 기획의 디테일과 판매 채널 관리법, 프로모션 단가 계산법을 집요할 정도로 캐물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라 생각하며 몇 가지 팁을 일러주었지만, 본능적인 쎄함에 적당히 말을 아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사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전체 회의에 들어가면 대표의 날 선 화살이 오직 내게만 쏟아졌다.

"이렇게 싸게 팔아서 남는 게 뭡니까? 마케팅팀이 광주에 있으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니에요?”

단기간에 자금을 회전시키라는 대표의 지시에 따라 대형 플랫폼인 톡딜을 성공시킨 직후였다. 당시, 생산 단가에 따른 판매 할인율은 경영진의 승인을 거쳐 진행한 프로모션이었다. 목표보다 더 큰 매출액을 일으킨 프로젝트를 마쳤건만, 돌아온 것은 칭찬이 아니라 모욕이었다.

"생각이 있으면 말을 해봐요. 일을 이따위로 할 겁니까?"

순식간에 나는 '일은 안 하고 매출 인센티브만 축내는 눈엣가시'로 낙인찍혔다.


광주 사무실은 하루아침에 폐쇄되었고, 마케팅팀은 본사로 강제 흡수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게차 파레트 작업과 잡초 뽑기, 공장 허드렛일로 끌려다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사직서를 던졌다. 비슷한 시기에 회사를 탈출했던 본사의 막내 사원 김주임을 밖에서 만났을 때, 마침내 진실의 뚜껑이 열렸다.

"형, O대리가 대표랑 본사 직원들 돌면서 매일 팀장님 욕하고 다녔어요. '마케팅팀은 밖에서 꿀만 빤다', '회사가 힘든 건 노아 팀장이 단가를 후려쳐서 그렇다'고요. 형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막내인 제가 뭘 어쩔 수가 없어서 조용히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미안하네요."

"그리고 형, O대리요. 지금 차장 달았다더라구요. 온라인 마케팅 차장이라던데."

내가 쫓겨난 그 자리에 앉아, 내가 1년간 피땀 흘려 세팅해 둔 온라인 판매 채널과 억대 거래처를 고스란히 집어삼킨 사람이 바로 그 상냥하던 O대리였다.


그녀는 회계 전공자였다. 경리로 취직했던 그녀는 지금 온라인 마케팅 팀의 차장으로 고속 승진을 했고, 온라인 마케팅 경력자였던 나는 회사를 떠났다. 전공이 없어도 압도적인 성과와 실력만 증명해 내면 회사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뼈아픈 토사구팽을 겪으며 깨달았다. 회사라는 거대한 생태계는 단순히 '일 잘하는 직원'을 우대해 주는 공정한 경기장이 아니다. 실력 위에 정치가 얹어지고, 헌신 뒤에 암투가 도사리는 전쟁터다. 과도한 성과와 성공은 동료들의 질투를 부르고, 잘 갖춰진 시스템은 하이에나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슬롯는 일만 잘한다고 해서 살아남는 곳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회사에 나를 갈아 넣으면 회사가 발전하고, 회사가 발전하면 내가 발전하고, 그런 나의 헌신을 회사가 알아봐줄거야. 그러니 오늘도 최선을 다해야지!’

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가.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 뒤로 나는 일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회사에 내 모든 영혼을 쏟아붓지 않는다. 120%의 열정을 바쳐 인정과 칭찬을 갈구하는 대신, 요구받은 100%만큼을 단단하고 빈틈없이 쳐내는 프로페셔널한 선을 긋기 시작했다. 내가 쥔 패와 핵심 기술은 절대 쉽게 내주지 않으며, 친절한 미소 뒤에 숨겨진 칼날을 의식하며 안전거리를 유지한다. 회사가 주는 월급만큼의 성과를 보여주되, 그 이상의 헌신을 원한다면 정당한 보상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실력이 없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동기가 없기 때문에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월급쟁이에게 가장 확실한 동기는 결국 합당한 대가와 존중이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내 몫 이상의 일을 해냈을 때는 결코 침묵하지 않고 확실하게 내 성과를 포장한다. 그래야 알아주니까. 회사는 내 삶을 바쳐야 하는 신성한 곳이 아니다. 나의 노동과 회사의 보상을 교환하는 계약의 장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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