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은 환불이 안 되나요: N회차 이직과 비전공자의 발버둥
이사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바카라상 서랍을 열어보니 그동안 모아놨던 명함첩이 보였다.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명함들 사이, 내 명함들이 중간 중간 끼워져 있었다.
“**한의원 운동처방사”
“**병원 부속운동치료실 실장”
“**테크 사원”
“**컨설팅 부장”
“**식품 온라인마케팅 팀장”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등 떠밀리듯 들어갔던 첫 온라인 게임에서부터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N회차에 걸친 이직의 흔적들이다. 명함첩을 넘기다 낯익은 이름들이 보인다. 내 친구와 주변인들의 이름이다.
영문학과를 들어갔던 수재. 영화를 좋아하니까 졸업하면 영화 번역 일을 하겠다며 도도한 척하던 친구는 지금 광주 하남공단에서 플라스틱 사출 금형 공장의 해외 영업부장을 맡고 있다. 어느 정도 전공과 연관이 있는 일을 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냥 영업사원이다. 다만, 영어권 바이어들을 상대한다는 점만 다를 뿐.
공부에 큰 관심이 없었던 친구의 명함도 보인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던 그 친구는 손재주가 좋아서일까? 지금은 자동차 정비소의 사장이 되어 있다. 휠 복원과 도색을 전문으로 하고 있으니, 따지고 보면 이 녀석 또한 전공과 연관이 있는 것일수도 있겠다.
화학공학과에 다녔던 소문난 영재. 동네에서 가장 공부를 잘한다는 그 동생은 금형 부품회사의 대리가 되어 있다. 화학공학과니까 그 회사에 들어간거냐고 물어봤더니, “아니 형. 이거 외노자들도 하는 일인데? 나 그냥 엄마 빽으로 들어간거야.”라고 하더라. 들어보니 급여도 짭짤하고 근무 환경도 꽤 좋다고 했다. 다만, 잦은 야근과 특근으로 워라밸이 무너진게 문제지만.
대학 시절 공부보다는 술과 유흥에만 관심이 많던 내 친구는, 동네에서 꽤 큰 학원을 경영하는 원장이 되어 있다. 알바 삼아 했던 빨*펜 선생이 적성에 맞았다나 뭐래나. 내 아들도 나중에 크면 학원에 보내라고 하던데, 그 친구의 과거를 생각하니 쉽게 콜을 외치진 못했다.
호텔조리학과를 나와 미슐랭 식당에서 메인 쉐프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녀석은 지금 온라인 커머스 회사에서 상세페이지 기획팀장이 되어 있다. 내가 마케팅 회사를 운영할때 여러모로 도움을 받은 적 있는데, 생각보다 꽤나 유능한 업무 능력을 보여주었다. 듣기로는 맛집 홍보에 최적화된 인력이라던데, 생각해보니 그럴싸 하다.
대학 시절 교수들은 "전공 하나만 똑바로 파면 평생 밥벌이가 보장된다"고 강조했다. 중도에 휴학을 하거나 중퇴라도 할라치면, '도망자' 혹은 '부적응자'라는 낙인을 찍으며 겁을 주었다. 부모님은 비싼 등록금이 그 아이의 미래를 윤택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매우 혹독했고, 슬롯는 빠르게 변화했다.
외환위기로 나라가 휘청이고, 전도 유망하다는 학과는 몇 년 만에 폐과의 위기에 몰렸다. 그들은 좁디좁은 제도권의 벽에 가로막혀 쫓겨나듯 다른 직무를 맡아야 했고, 사장의 변덕과 조직의 횡포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사표를 던져야 했다.
'이러려고 비싼 등록금 내가며 대학을 다닌게 아닌데…’
‘거기 말고 다른 전공을 했어야 했나…’
이런 생각이 들때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당신의 하루하루가 모두 자양분이 되어 언젠가는 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미 빛을 발하고 있음에도 당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전공을 살리지 못했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전혀 없다. 대학교 수업에서는 짜증을 부리는 사장에게 대처하는 법 같은 것은 알려주지 않았다. 노동법도 알려주지 않으니 근로계약서에 독소조항이 있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이제 변덕쟁이 사장의 마음을 구슬리는 마법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너무 일을 잘할 필요도 없지만 절대로 일에 펑크를 내면 안 된다는 업무 밸런스를 터득했다. 회사에 몸과 영혼을 갈아 넣지 않아도 나를 증명하고 내 자리를 지켜낼 수 있는 안전거리와 조절력도 갖췄다. 이런 것들은 절대로 대학을 포함한 ‘공부’만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진짜 경험이다.
화려한 전공과 잘 쌓아올린 스펙은 서류면접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회사의 구성원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전공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직원들이 정말 꽤나 많다. 그리고 그들은 꽤나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전문 분야임에도 전공자 못지 않은 감각과 스킬로 어려운 일도 척척 해낸다.
전공을 살리지 못한다고 좌절할 이유는 없다. 정해진 레일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목적지를 잃은 것은 아니다. 더 많은 경험과 갖가지 스킬들을 체득할 수 있는 자유로움은, 오직 궤도를 이탈해 본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특권이다. 정해진 길 하나에 갇히지 않았기에 우리는 어떤 낯선 환경에 내던져져도 유연하게 바닥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내 명함 내용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는 일이다. 또다시 낯선 분야로 튕겨 나가 새로운 직함을 달게 될 수도 있고, 전혀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또 다른 명함을 파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변화가 두렵지 않다. 다양한 곳에서 온몸으로 부딪혀 얻은 생존의 근육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까. 어떤 이름표가 적힌 명함을 쥐어주든 어떻게든 제 몫의 밥벌이를 해내고야 마는 그 질긴 유연함이야말로, 비전공자인 우리가 온몸으로 증명해 낸 가장 훌륭한 스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