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우연히 쌓은 최고의 스펙

전공은 환불이 안 되나요: N회차 이직과 비전공자의 발버둥

byNoA

누군가 나에게 “지금 당신의 가장 강력한 업무능력을 하나만 꼽는다면?”이라고 묻는다면, 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컴퓨터 활용 능력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코딩 작업자처럼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활용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조금씩은 다 할 줄 안다. 엑셀, 파워포인트, 워드, 한글 같은 문서 프로그램에서부터 병원의 EMR전산과 물류 관리 시스템까지. 이런 프로그램들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동할 수 있는지, 그 구조를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데이터를 활용하는 감각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쉽게 말해, 모니터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부딪혀 해결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도 딱 그 능력 하나만으로 들어왔다.


처음부터 컴퓨터를 잘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교에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컴맹이었으니까. 친구들과 피씨방에 갈 일이 있으면, 컴퓨터 전원 버튼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헤맬 정도였다. 그 친구는 내가 앉은 자리의 컴퓨터를 켜주고, 싸이월드 홈페이지까지 열어주고 나서야 스타를 할 수 있었다. 그랬던 내가 군에 입대하면서부터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동기였던 L은 컴퓨터를 정말 잘했다. 그는 한글 프로그램으로 문서를 만들때 마우스를 거의 쓰지 않았다. ‘Alt+L’버튼을 누르더니 글자 모양이 바뀌었고, ‘Alt+T-C-D’를 누르니 글자들이 가운데로 정렬되어버렸다. 그 외에도 대부분을 단축키로 처리했고, 그 덕에 남들보다 작업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녀석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마법을 부리는 것 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동경해, 그에게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수첩에 각종 단축키들을 적어두고 외우기를 반복했고, 시간이 남을때마다 한컴 타자연습에 몰두했다. 그렇게 제대할때 쯤, 여간한 한글 문서는 마우스를 거의 쓰지 않고 만들 수 있었고 타자는 400타를 훌쩍 넘길 수 있었다. 제대 선물로 컴퓨터를 받은 후로부터는 눈을 뜨면 컴퓨터부터 켜는 습관이 들었다. 영상 다운로드와 컴퓨터 게임 등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혹시라도 컴퓨터가 망가지게 되면 어떻게든 내 손으로 고치려고 애썼다. 더 좋은 사양을 필요로 하는 게임이 출시되면 그에 맞는 스펙으로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해야 했고, 정교한 컨트롤을 위해서는 키보드와 마우스가 중요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에 대해 알게 되었고, 주변에서 컴퓨터가 고장났다고 하면 직접 고쳐줄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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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원무과장을 거쳐 본부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도 컴퓨터 활용 능력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다. 공문서를 작성할 때 반드시 지켜야하는 자간과 글씨체, 표, 글머리 등등이 있는데, 남들은 마우스를 클릭해가면서 자간을 맞추고 있을때, 나는 간편하게 단축키로 끝낼 수 있었다. 엑셀을 활용해 직원들의 급여 계산기를 만들어 이슬롯의 신임을 얻었고, 각종 행사에 필요한 프리젠테이션은 파워포인트로 멋들어지게 만들어냈다.

컴퓨터 활용 능력은 온라인 마케팅 회사를 운영할 때도 빠질 수 없는 무기였고, 온라인 영업 팀장으로 재직할 때는 오픈마켓 상세페이지를 만들 정도가 되었다. 비록 보드를 이용한 작업물이었지만, 퀄리티가 꽤나 뛰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오너가 원하는 인재상은 “컴퓨터를 좀 잘 쓰고, 여러가지 일을 하는데에 거부감이 없으면 좋겠다.”였다. 거기에 딱 맞는 사람이 나였기에, 자신 있게 말했다.

“컴퓨터 관련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고, 안해본 일이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우리는 종종 '전문성'이라는 단어에 매몰되곤 한다. 대학, 전공, 석박사 학위나 화려한 자격증 같은 것들만이 나를 증명해 줄 거라 믿는다. 하지만 현장에서 내가 목격한 진실은 조금 달랐다.


회사가 직원에게 진정으로 기대하는 것은 연구실의 심오한 학문이 아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업무의 병목을 시원하게 뚫어줄 '실전 도구 장악력'이다. 상사가 던진 두서없는 데이터를 보기 좋게 엑셀로 가공해 결론을 뽑아내는 일, 거래처에 보낼 제안서의 줄 간격과 배치를 깔끔하게 다듬어 신뢰를 주는 일, 멈춰버린 복합기나 에러 난 전산 프로그램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직원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일. 열정이 넘쳤던 나는 처음 접해본 일이더라도 일단 해봤다. 이런 경우 대부분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회사도 내가 그 일에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남들이 "그건 할 줄 모르는데요?"라며 손을 놓고 있을 때, 군말 없이 키보드를 두드려 답을 찾아내는 그 사소한 '손기술'이야말로 모든 조직이 가장 탐내는 진짜 능력이다.


대학교를 다닐 때는 운동처방 이론을 달달 외우는 것이 내 미래를 지켜줄 유일한 동아줄인 줄 알았다. 밤을 새워 해부학 용어를 외우고, 산소포화도에 대해 공부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 커리어를 지탱해준 뿌리는, 군대에서 수첩에 적어가며 외웠던 'Alt'와 'Ctrl' 단축키 몇 개였다.

어디서 어떤 배움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무기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신이 오늘 업무를 조금 더 편하게 만들기 위해 찾아본 엑셀 함수 하나, 유튜브를 보며 익힌 영상 편집 기술, 귀찮은 잡무를 줄이기 위해 바꾸어 놓은 작은 시스템 하나가 나중에는 당신의 든든한 뿌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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