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상기 본인은 사직하고자 합니다

전공은 환불이 안 되나요: N회차 이직과 비전공자의 발버둥

byNoA

“상기 본인은 201*년 *월 *일부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넓디 넓은 A4 용지 위에 적힌 문장은 지극히 정중하고 건조했다.

사직서를 내밀기 전, 병원장에서 수백억 대 재단 이사장이 된 그에게 먼저 구두로 퇴사 의사를 밝혔다. 그는 사색이 되어 나를 붙잡았다.

"외연을 확장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본부장이 나가면 어떡합니까. 연봉을 올려줄게요. 아니면 몇 달 유급 휴가를 다녀오든가, 원하는 조건을 다 맞춰줄 테니 다시 생각해요."

그 달콤한 회유가 역설적이게도 내 퇴사 의지에 쐐기를 박았다.

'이렇게 사람 귀한 줄 알았으면 진작 잘하지 그랬습니까.'

나는 직원 10명짜리 한의원을 400명 규모의 대형 브랜드로 키워낸 오픈 멤버였다. 30살 나이에 직원 중 최고 직바카라인 본부장 자리에 올랐고, 남부럽지 않은 연봉을 받았다. 주변에서는 미쳤다고 혀를 찼다. 그 안정적인 밥그릇을 왜 제 발로 걷어차느냐고.


나의 퇴사 사유는 조직의 가장 윗선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파국의 시작은 지방 거점 병원에 '한방 피부과'를 신설하면서부터였다. 이사장은 만성 난치성 피부 질환을 한방으로 고치겠다며, 서울에서 명성이 자자하다는 J원장을 삼고초려 끝에 영입했다. 숙소 마련부터 인테리어 공사, 팀원 세팅까지 모든 실무 총괄은 어김없이 내 몫이었다.

"숙소요? 혼자 살 건데 대충 방 하나에 화장실만 딸려 있으면 됩니다."

첫 통화에서 그는 털털하고 무던해 보였다. 하지만 그 가면은 취임 한 달 만에 산산조각 났다.


J원장은 피부 치료를 위해 3평짜리 '편백 온찜질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그가 지정해 준 업체에서 날아온 견적서는 무려 3,000만 원대였다. 업체에서 제시한 논문과 상세 스펙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특수 기술 따위는 없는, 평범한 찜질방 구조물에 불과했다. 다른 인테리어 업체를 통해 확인한 적정 시공가는 500만 원 선이었다. 나는 해당 견적서와 비교 견적서를 들고 이사장실로 올라갔다.

"무리한 요구입니다. 동일한 시공을 500만 원에 끝낼 수 있습니다."

내 보고를 받은 이사장은 단칼에 결재판을 덮었다.

"J원장의 의견은 납득할 수 없네요. 500만 원짜리 일반 업체에 맡겨서 진행하죠."

그 결정을 J원장에게 전달하자, 그는 격노했다. 그 업체가 아니면 진료를 거부하겠다며 버텼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기행이 시작되었다.


한창 진행 중이던 피부과 인테리어 현장에 들이닥쳐 "이게 인테리어냐"며 시비를 걸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새로 바른 벽지를 제 손으로 찢어발겼다. 목공사가 끝난 리셉션 데스크를 발로 차 부수고, 멀쩡한 아트월에 페인트를 뿌렸다. 대기실에 들여놓은 고급 소파는 날카로운 칼로 난도질을 해놓았다.

인테리어 소장과 나는 넋이 나간 채 무릎을 꿇다시피 매달렸다. 원하는 디자인이 있으면 맞춰드리겠다 애원했지만, 그는 조소를 흘리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알아서 잘 해보세요. 맘에 안들면 내가 다 때려부술거니까, 그런줄 아시고요."


명백한 업무 방해이자 폭력. 나는 현장 사진과 피해 내역을 들고 다시 이사장을 찾았다. 조직의 수장으로서 명확한 중재와 결단을 내려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사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 정도는 본부장이 알아서 현장에서 유도리 있게 수습해야지, 일일이 나한테 가져오면 어떡해요?"

권한은 단 1그램도 주지 않으면서, 모든 갈등과 폭탄의 뇌관은 실무자인 내게 떠넘기는 태도.

별 수 있나. 까라면 까야지.

나는 밤을 새워가며 폐기물을 치우고, 공사팀을 다독여 겨우 겨우 공사를 이어갔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공사팀으로부터 전화가 울리면 부리나케 현장으로 달려가 사태를 수습하기 바빴다. 주변 모두가 나를 애처로운 모습으로 바라보았지만, 그 누구도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든 J원장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지만, 그는 “내가 왜? 알아서 잘해보세요. 일 잘하시잖아요.”라며 나를 조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멘탈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어제 J원장 만나서 이야기 했어요. 온찜질실은 J원장이 원하는 3,000만 원짜리 업체로 진행하죠."

이사장이었다. 나는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기가 차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 내게, 이사장은 한숨을 내쉬며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인테리어 하면서 문제가 좀 있었다면서요? 얘기 들어보니까 J원장이 원하는 인테리어가 있었는데, 본부장이 안 된다고 막았다면서요. 일단 인테리어는 원안대로 진행하기로 이야기 했어요. J원장 달래느라 내가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참… 근데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체 뭐 했어요?"

‘제가 계속해서 이야기 드렸잖습니까? 저보고 알아서 하라면서요. 권한도 없는 제가 뭘 어떻게 알아서 할 수 있었는지, 제 입장을 고려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라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죄송합니다."

짧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왔다. 이제와서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불 꺼진 사무실에서 조용히 사직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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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과는 7년을 넘게 같이 일해왔다. 이사장은 공적인 일에서부터 매우 개인적인 일들과, 남들이 알아서는 안되는 음지의 일까지 내게 맡겼다. 그만큼 서로를 믿었고, 이해하고, 아껴주는 부하직원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7년을 넘게 동고동락 하던 나와의 의리와 믿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병원을 경영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벌이니까.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는 나 같은 부하직원 보다는 거점 병원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유능한 진료과장이 더 중요했다. 본인의 결정도 손바닥 뒤집듯 버릴 만큼 말이지.


이 사태에 대한 바카라임자, 아니 총대를 멜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나였던 것이고. 그것으로 이사장이, 임원진이, 그리고 병원 모든 구성원들의 눈과 귀를 덮을 수 있다면 나의 억울함 따위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언제든지 갈아끼울 수 있는 작은 부품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뭐…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노아 본부장이야 뭐, 나중에 달래주면 될거야.”라는 얕은 속내가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7년간의 찬란한 청춘을 바쳤던 병원을 떠났다. 더 이상 소모품이 되고 싶지 않았다. ‘권한’이 없는 자리에서 ‘바카라임’만 떠안게 되는 비참한 현실속에서 ‘믿음’마저 깨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회사들도 제각각의 퇴사 이유가 생겨났다.

몸이 아파도 꾹 참고 다녔던 슬롯적기업을 박차고 나온 이유는 그들의 ‘위선과 부조리’를 방관할 수 없어서였고, 높은 인센티브를 마다하고 식품 회사를 탈출한 이유는 직원을 값비싼 ‘노예’처럼 부리는 수직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사직서를 내기 전, 엄청난 고민이 밀려왔다. 나가면 어디서 뭘 어떻게 해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할까에 대한 일생일대의 고민. 살면서 이만큼이나 무거운 고민을 해본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불안하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 될 정도의 고독한 고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직서를 썼다.


사직서에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너무 많았다.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 바꿔야 할 것들,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느꼈던 부조리함, 다른 직원들이 목 놓아 말하는 개선점들, 분노, 서러움, 아쉬움…

그런 거대한 감정의 파도를 토해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회사는 변하지 않으니까. 그걸 알기 때문에 나는 도망치는 것이니까.

그리고 나는 짧은 한 줄을 남겼다.

“일신상의 사유로 퇴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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