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이에요

by선비천사

이른 아침, 입안에 남아 있던 아련한 단내는 환영이었을까. 꿈속의 나는 동네 가게 유리병 속에 손을 깊숙이 집어넣고, 투명한 알사탕을 가득 쥐어 오독오독 씹고 있었다. 입안 가득 터지던 달짝지근한 향기가 어찌나 또렷했던지, 눈을 뜨고 나서도 한동안 혀끝에 침이 고였다. 창호지 문 사이로 비쳐 드는 아침 햇살 속에 먼지들이 잔잔히 떠다녔다. 툇마루 너머의 세상은 여전히 헐벗고 팍팍했지만, 어린 마음은 이미 온통 그 눈부신 사탕 병에 빼앗겨 있었다.


여섯 살 무렵, 마을 어귀의 가게는 내게 세상의 모든 빛이 모여드는 별천지였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들 사이에서 홀로 유리창을 달고 서 있던 그 나지막한 목조 건물. 그곳 유리장 너머에는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눈에 차던 알사탕 병이 놓여 있었고, 그 곁으로 과자 상자와 어른들이 찾던 탁주 병, 붉은 담배 갑들이 빈틈없이 쌓여 있었다. 밭에서 캐낸 고구마나 감자가 간식의 전부였던 시절, 아이들은 유리창에 코를 붙이고 사탕과 과자를 한참 들여다보았고, 밭일을 마친 어른들은 막걸리 한 병을 받아 들고 평상에 걸터앉곤 했다.


그 시절의 가게에서는 이상한 거래가 통용되곤 했다. 손에 동전을 쥐고 들어가는 이보다 빈손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손에 쥐고 나오는 이들이 더 많았다. 어른들은 무심하게 물건을 집어 들며 가게 주인을 향해 나직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주인아줌마, 외상이오."


그러면 아줌마는 낡은 공바카라을 펼쳐 때 묻은 몽당연필로 빗금을 긋고는 미소와 함께 물건을 내어주었다. 어린 눈에 그 광경은 신기함을 넘어 일종의 요술처럼 느껴졌다. 돈이라는 종이쪽지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것이었는데, '외상'이라는 말 한마디만 던지면 세상의 모든 달콤함이 정당하게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부모님이 땡볕 아래서 밭을 매고 몸을 깎듯 품을 팔아 갚아야 하는 빚이라는 사실을, 여섯 살배기 아이가 가늠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에게 외상이란 현실의 결핍을 단숨에 뛰어넘게 해주는 마법의 열쇠였다.


꿈에서 깬 그날 아침, 혀끝에 남아 있던 단내는 어린 마음을 온통 사탕 생각으로 채웠다. 나는 신발조차 짝짝으로 꿰어 차고 마을 가게로 달음박질쳤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양초의 기름진 냄새와 성냥의 유황 향, 그리고 아득한 사탕의 단향이 코끝을 스쳤다. 나는 까치발을 높이 들고 유리병 속 알사탕 세 알을 주저 없이 쥐어 잡았다. 통통하고 조그만 손통 안에 알사탕의 묵직한 감촉이 차올랐다.


나는 평소 어른들이 하던 것처럼 턱을 조금 치켜들었다. 그리고 사탕 세 알을 손에 꼭 쥔 채 제법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이에요!"


'외상'이라는 말도 제대로 못 해 '이상'이라 해놓고, 나는 그것이 무슨 대단한 주문이라도 되는 양 사탕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사탕을 꼭 쥐고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를 가게 아줌마는 기가 차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내 허리를 꺾어 웃던 아줌마는 나를 혼내기는커녕, 사탕을 쥔 내 작은 손통을 따뜻하게 꼭 감싸 쥐고 함께 우리 집 마당으로 향했다.


마당에서 쌀을 씻던 어머니 앞에 선 아줌마가 허허 웃으며 방금 일어난 소동을 전했다. "글쎄 이놈이 사탕을 쥐고는 '이상이에요' 하고 외치지 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가난한 것은 견뎌도 남의 것을 허락 없이 탐하는 일만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던 어머니였다.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버텨온 어머니에게, 자식이 가게에서 물건을 그냥 가져왔다는 사실은 가슴을 찢는 충격이었으리라. 아줌마가 웃으며 돌아간 뒤, 나는 마당 한가운데서 매서운 종아리 세례를 받아야 했다. 붉게 부어오른 종아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사탕 한 알 먹지 못한 것이 억울해 오래도록 훌쩍였다.


당시에는 어머니가 왜 그리 차갑게 화를 내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달콤한 사탕 한 알을 허락해주지 않는 현실이 서러워 울었을 뿐이다. 나에게 '외상'은 세상의 결핍을 건너뛰게 해주는 마법이었지만, 가난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부모님에게 외상은 언젠가 반드시 자신의 피와 땀으로 메워야 할 묵직한 삶의 바카라임이었던 것이다.


어느덧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내 머리 위에도 하얀 서리가 내렸다. 오늘날의 세상은 지갑 속 플라스틱 카드를 결제기에 대기만 하면 수초 만에 거래가 완료되는 정교한 신용의 시대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원하는 모든 것이 집 문 앞에 도달하고, 전자 시스템의 숫자들이 사람의 신용을 매긴다.


그러나 가끔은 그 빈틈없는 신용의 질서 뒤에서 아득한 쓸쓸함을 느낀다. 오늘날의 신용은 엄격한 담보와 체납에 대한 경고로 유지되지만, 그 옛날 60년대 시골 마을의 외상 장부에 적혀 있던 것은 단순한 금전적 부채가 아니었다.


누구네 집 밀가루 한 봉지, 누구네 집 성냥 두 갑, 막걸리 한 병. 이름 옆에는 금액이 적혔고, 그 아래에는 또 다른 집의 이름이 이어졌다. "이 사람이 내일도 밭을 갈고 모를 심어 반드시 이 빚을 갚으리라"는 이웃 간의 믿음이었다. 당장 주머니에 동전 한 닢 없어도 서로의 생계를 잠시 유예해 주고, 고단한 삶의 무게를 함께 마주 보며 견디게 하던 따뜻한 체온의 교환이었다.


여섯 살의 나는 단지 알사탕이 먹고 싶어 '이상이에요'를 외쳤지만, 돌이켜보면 우리네 부모님들 역시 그렇게 외상을 달며 삶이라는 거친 세월을 잠시 버텨내셨던 것은 아닐까.


지금도 해 질 녘이 되어 거리에 노을이 뉘엿뉘엿 내리면, 문득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쓰던 그 낡은 외상 장부가 그리워진다. 그 장부에 적힌 것은 빚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름 하나를 적어놓고 다음 날을 기다려주던 마음, 가진 것 없어도 서로를 믿어주던 마음이 그 빛바랜 종이 위에 함께 적혀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 한쪽 어디쯤에는, 끝내 먹지 못한 여섯 살 아이의 알사탕 세 알도 외상으로 남아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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