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정원 한구석, 빛바랜 운동기구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체력단련장으로 선선한 바람이 스쳤다.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늦은 오후의 햇살 아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쉰을 갓 넘겼을까. 두 사람은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처럼 보였다.
남자는 옅은 하늘색 병원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두 손은 쇠로 된 보행기의 차가운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있었는데, 팔꿈치와 마디 굵은 손등에는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의 하체는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오른쪽 발끝은 안쪽으로 굽어 있었다.
병원복 하의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오른발을 보며 나는 그가 얼마 전까지 병원에 있었으리라고 짐작했다. 무슨 병을 앓았는지, 얼마나 긴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평생 너무도 당연하게 내디뎠을 한 걸음을 이제는 온몸의 힘을 모아 되찾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몇 걸음 앞서 선 여인은 남자를 향해 돌아서 있었다. 여인은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서며 손뼉을 쳤다. 짝, 짝, 짝. 정적을 깨는 손뼉 소리가 낮고 둔탁하게 울렸다. 여인의 입모양은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소리는 바람에 흩어져 들리지 않았다.
여인은 딱 다섯 걸음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가가 손을 내밀면 곧장 닿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여인은 그 다정한 다섯 걸음 뒤에서 계속 손뼉을 치며 발짓으로 남자를 끌어당겼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 그가 스스로 해내야 할 몫을 빼앗지도 않았고, 너무 멀리 물러나 그를 막막하게 하지도 않는 거리였다.
남자가 숨을 고르더니 오른쪽 다리를 끌어올렸다. 둔중한 운동화 뒷굽이 보도블록을 긁는 소리가 정원의 정적을 갈랐다. 한 발을 떼어놓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목덜미와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히는 동안, 보행기 아래 작은 바퀴가 덜덜거리며 한 뼘 앞으로 나아갔다.
남자가 힘들게 한 걸음을 내딛자 여인 역시 딱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다시 다섯 걸음으로 유지되었다.
세 번째 걸음을 떼려 할 때, 남자의 오른발이 보도블록 위에서 멈칫했다. 몸의 중심이 순간 흔들리며 보행기가 둔탁한 소리를 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으나 여인은 조급히 다가가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박자를 맞추던 손뼉의 간격을 조금 늦추며, 남자가 스스로 균형을 잡을 시간을 벌어주었다. 짝, 짝. 재촉하지도, 멈추지도 않는 박자였다. 남자는 떨리는 다리에 다시 힘을 주고 숨을 길게 내쉬더니, 마침내 세 번째, 네 번째 걸음을 차례로 내디뎠다.
그 느린 움직임을 나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한 채 바라보았다.
나는 문득 두 사람 사이의 다섯 걸음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대신 앓아줄 수는 없고, 마비된 다리를 대신 움직여줄 수도 없다. 대신 걸어줄 수는 없지만, 걸어올 사람이 포기하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기다려주는 것. 어쩌면 함께 산다는 것은 그런 일인지도 몰랐다. 여인이 치는 손뼉 소리는 멈춰 선 남자를 다시 삶의 자리로 불러들이는 나지막한 신호이자, 그 거리를 견디는 두 사람만의 약속이었다.
마침내 남자가 다섯 걸음을 모두 내딛고 여인 앞에 이르렀다. 남자는 보행기에 몸을 기대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여인은 더 이상 손뼉을 치지 않았다. 가만히 다가가 남자의 땀 젖은 이마를 닦아주고,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두 사람 사이에 긴 대화는 없었다. 그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숨을 고를 뿐이었다.
그들의 모습 위로 붉어지는 오후의 햇살이 길게 그늘을 드리웠다. 가을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부드럽게 흔들고 지나갔다.
정원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그 소리가 자꾸 따라왔다. 짝, 짝, 짝. 다섯 걸음 앞에서 한 사람을 기다리던 소리였다. 어느새 정원은 멀어졌는데도, 그 둔탁하고 따뜻한 손뼉 소리는 오래도록 내 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같이 보면 좋은 글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전자바카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