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년의 항해 끝에 마주한 우울, 그리고 노을 속으로 나아가는 조각배
세상이 온통 하얀 종이 같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 소년이 교과서 귀퉁이를 조심스레 찢어 배 한 척을 접었습니다.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작은 종이배였습니다.
소년은 부모님이라는 든든한 등대를 뒤로하고 홀로 노를 저었습니다. 작고 위태로운 배였지만 소년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내가 먼저 길을 내어주고, 남의 슬픔을 내 것처럼 아파하면 바다도 가장 순한 길을 열어줄 거라 믿었습니다. 그것이 소년의 첫 약속이었습니다.
소년은 어느덧 수염이 거뭇한 선장이 되었습니다. 종이배는 세월의 겹을 쌓아 묵직한 조각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배 위에는 이제 선장의 어깨를 기댄 아내와, 그의 눈을 닮은 아이들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선장은 매일 아침 자신을 깎아 배의 구멍을 막았습니다. 32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며 닳아버린 목소리는 돛이 되었고, 남에게 길을 내어주느라 굽어버린 등은 튼튼한 키가 되었습니다. 풍파는 끊임없이 배를 흔들었지만, 선장은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배 밑바닥에 가득 차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른 항해자였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잦아들더니 바다가 기분 나쁜 회색빛으로 변했습니다. 파도가 치는 것도, 구멍이 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배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배 안으로 **'무거운 물'**이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물은 퍼내도 줄지 않았습니다. 노를 쥔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습니다. 아내가 곁에서 이름을 불렀지만, 깊은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선장은 처음으로 노를 놓았습니다. 잿빛 장막 속에서,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어차피 가라앉을 배라면, 여기서 멈추는 게 낫지 않을까.'
포기라는 이름의 닻이 그의 발목을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조각배가 닿은 곳은 안개에 싸인 작은 섬이었습니다. 그곳의 수리공들은 배를 고치기 전, 선장의 젖은 마음을 먼저 햇볕에 말려주었습니다. 수리공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선장님, 이 물은 바다에서 들어온 게 아닙니다. 어디서 온 것인지 아십니까?" "…… 모르겠습니다." "선장님이 차마 버리지 못한 것들이, 안에서 물이 되어 차오른 겁니다."
수리공은 선장이 32년간 간직해 온 낡은 기억들과, 남을 위해 참아왔던 눈물들을 하나씩 꺼내 닦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따뜻한 손길을 모아 배 밑바닥을 겹겹이 단단히 덧대었습니다. 비로소 선장은 깨달았습니다. 뒤집힐까 두려워했던 이 낡은 배가, 사실은 수많은 사랑의 못질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배였다는 것을요.
다시 바다로 나온 선장 앞에 기적 같은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하늘과 바다가 온통 금빛으로 뒤섞인 노을의 시간이었습니다.
선장의 조각배는 이제 낡고 투박합니다. 여기저기 덧댄 나무판자들은 훈장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고단합니다. 팔 근육은 비명을 지르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오릅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노를 잡습니다.
언제 다시 그림자 늪이 나타날지 선장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배가 뒤집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설령 가라앉는다 해도, 그가 지나온 물결 위에 새겨진 찬란한 빛들이 그가 누구였는지 말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이 멀다. 그래서, 오늘도 노를 젓는다.
낡은 조각배 한 척이 은빛 물결을 가르며 나아갑니다. 선장의 뒷모습은 이제 슬픔이 아니라, 세상을 온몸으로 견뎌낸 자의 평온을 닮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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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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