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겠다는 제자에게 일갈한 적이 있었다. "눈물은 고작 종이를 적셔 얼룩을 남길 뿐이니, 문장은 피와 뼈로 새겨야 한다"라고. 선생이라는 자리는 가보지 못한 경지를 마치 다녀온 듯 꾸미는 법을 가르친다. 이제와 빛바랜 서재에 홀로 앉아 지난 글들을 뒤척이다 보니, 그 서슬 퍼런 일갈은 사실 나 자신을 향한 비명이었음을 깨닫는다. 나의 문장 어디에도 피 냄새는 나지 않았고, 뼈를 깎는 고통 대신 말갛게 마른 눈물 자국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참다 참다못해 피가 터져 꽃봉오리가 맺혔다고 치자. 세상은 그것을 미학이라 부르겠지만, 정작 그 꽃의 속살은 환희일까 아니면 찢어지는 통증일까. 우리는 늘 깨달음을 쫓는다. 그러나 그것은 심해와 같아서, 깊이를 자각하는 순간 이미 움직임을 멈춘 지식이 되고 만다. 그 찰나에도 나는 여전히 바닥을 기는 중생일 뿐이다.
나이 마흔을 넘기고 인생을 논하는 일이 이토록 쑥스러운 까닭은, 내 안의 충동이 여전히 남세스럽게 들끓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은 원초적인 탐닉과 시시각각 변덕을 부리는 마음의 결. 나는 자유를 원하는가, 아니면 잘나 보이고 싶은 욕망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가. 세속의 이름표를 탐하면서도 초연한 가치를 동시에 거머쥐려는 이 탐욕스러운 자아를 나는 어찌하지 못한다.
미워하는 사람을 향한 분노와 그 증오로부터 놓여나고 싶은 갈망이 내 안에서 날마다 전쟁을 치른다. 성욕이 시들면 생의 의욕이 없는 것이라 말하는 의학적 진단 앞에서, 나는 내가 건강한지 아니면 시들어가는지 가늠할 길을 잃는다. 작은 것에도 기쁨을 느껴야 한다고들 하지만, 정작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집안은 화평하고 가족 모두 건강하니 객관적으로 나는 행복의 지표 안에 안주하고 있다. 그런데 왜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땅벌 한 마리가 갇힌 채 윙윙거리며 벽을 치고 있는 것일까.
바카라 속에 모든 길이 있다고들 한다. 나 역시 평생을 바카라의 미로 속에서 헤맸다. 활자는 나에게 지식을 주었고,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창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바카라장을 넘기겠지만, 단언컨대 그 종이의 숲 안에 나의 길은 없다. 바카라 속의 길은 타인이 남긴 마른 발자국일 뿐이다. 내가 딛고 선 이 질척이는 삶을 건너게 하지는 못한다.
피와 뼈로 쓰라는 과거의 호통은 결국 활자의 감옥에서 걸어 나오라는 자바카라이었을 것이다. 깨달음을 연기하는 가식을 버리고, 비루한 욕망의 현장으로 직접 뛰어들어 발을 더럽히라는 경고였을 것이다. 머릿속의 땅벌이 다시 울어댄다. 이제는 그 소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깨달음이 한낱 욕망의 다른 이름일지라도, 혹은 쾌락이 허무의 그림자일지라도 상관없다.
나는 다시 펜을 든다. 바카라 속의 길을 덮고, 길 없는 나의 하루 위에 문장을 얹는다. 그게 비명이든 노래든, 이제는 묻지 않기로 했다. 인생의 중반을 넘어서도 여전히 길을 잃었으나, 적어도 내가 헤매고 있다는 그 감각만큼은 형형하게 살아있다. 어쩌면 그 막막한 자각만이, 내가 끝내 놓치지 않은 길이다.
(이 글은 과거 마흔의 문턱에서 썼던 고백의 파편들을 찾아 다시 엮어 올리는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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