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는, 내가 인간으로 살았다는 증거다

- 가장 믿었던 동료의 배신 끝에 깨달은 사람의 온기

by선비천사

서른 해 넘게 조직이라는 톱니바퀴로 살았다. 규격화된 서류와 위계 속에서 시스템을 지키는 법은 익혔으나, 정작 내 살점이 뜯겨 나갈 때 사용할 복구 매뉴얼은 없었다. 일을 내려놓고 창밖의 능선을 응시하는 오후면 습관적으로 돋보기안경을 닦는다. 투명해진 렌즈 너머로 마주하는 것은 평온함이 아니라, 가장 믿었던 이가 남기고 간 서늘한 자상이다.


그는 사무실이라는 삭막한 공간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바카라상을 마주하고 앉아 조직의 불합리를 견뎠고, 서로의 고단함을 토닥이며 긴 세월을 버텼다. 내밀한 고백들을 거름 삼아 우리의 유대는 울창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숲이 가장 깊었을 때, 나는 보았다. 그가 웃음 뒤에 숨겨둔 날카로운 올가미를. 그가 던진 말들은 이미 독이 되어 내 안을 타고 흘렀다.


나는 무너졌다.


배신은 뜨거운 분노가 아니라 차가운 감각으로 왔다. 심장 근처에 서늘한 냉기가 돌았고, 한동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에 지독한 구토를 느꼈다. 병실의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마음의 성벽을 높이 쌓았다. 타인은 이제 잠재적인 가해자였고, 나는 고독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날 이후, 사람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기이한 일이다. 나를 무너뜨린 것이 사람의 혀끝이었듯, 다시 일으켜 세운 것 또한 사람의 숨결이었다. 침묵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아내는 묻지 않고 밥상을 차려 내왔다. 양양의 거친 파도 앞에서 내 초라한 등을 밀어주던 그 투박한 손길은 어떤 수사학보다 정교했다. 얼굴 모를 독자들이 내 글 아래 남긴 짧은 공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내가 버린 세상이 건네는 뒤늦은 사과였다.


목수들은 나무에 박힌 옹이를 피하지 않는다. 옹이는 나무가 가장 아프게 상처 입은 자리이자, 그 상처를 견디기 위해 제 몸을 단단하게 응축시킨 흔적이다. 상처 없는 나무는 가구로 만들면 쉽게 뒤틀리지만, 옹이가 박힌 고목은 비바람에도 흔들림이 적다. 치열했던 슬롯생활 끝에 얻은 흉터는 내 삶이라는 목재에 박힌 가장 단단한 옹이였다.


상처를 준 것도 사람이요, 그 상처를 문장으로 벼리게 한 것도 사람이다. 나는 이제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살게 한 이들의 온기를 기록하기 위해 자판을 두드린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관계를 끊는 것은 생명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흉터의 균열 사이로 비로소 타인의 슬픔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도 산은 제 몸에 수만 개의 옹이를 품은 채 묵묵히 서 있다. 내 글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단단한 옹이가 되기를 소망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인해 비틀거리지만, 결국 서로의 굽은 등을 지팡이 삼아 다시 걸어 들어간다.


흉터는, 내가 인간으로 살았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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