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은 비누가 아니라 얼룩을 바라보는 일이다
내 안에는 두 마리의 짐승이 산다. 햇살 아래서 꼬리를 흔드는 온순한 양과, 어둠 속에서 타인의 상처를 입맛 다시며 지켜보는 굶주린 늑대다. 사람들은 대개 나의 양을 보고 손을 흔들지만, 정작 거울 앞에 선 내가 마주하는 것은 노랗게 번들거리는 늑대의 안광이다. 나는 나쁜 놈이면서 동시에 좋은 놈이다. 이 문장은 오랫동안 내 삶의 편리한 면죄부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쓴 서정적인 문장들은 대개 내 안의 악취를 가리기 위한 방향제였다. 꽃비가 내린다거나 어머니의 손마디 같은 말들을 원고지에 채울 때,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인간이라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그건 문학이라기보다 정교한 세탁에 가까웠다. 나는 내 결점을 문장 속에 숨기는 법을 본능적으로 익힌 기만자였다.
얼마 전 소래산을 오를 때였다. 무릎이 좋지 않은 아내가 내 등 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발을 헛디뎠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친 것은 아내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아, 오늘 산행 리듬 다 깨졌네' 하는 서늘한 짜증이었다. 당신 괜찮아?라고 묻는 내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정작 내 손은 아내를 부축하기보다 등산 스틱을 더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아내가 미안하다며 먼저 가라고 했을 때, 나는 잠시 망설이는 척하다가 그럼 천천히 와요 라며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내 발걸음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나도 피곤하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라는 비겁한 합리화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내 이기심을 각자의 페이스라는 세련된 말로 포장하며 혼자 정상으로 향했다. 소래산의 나무들이 그 뒷모습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식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빙하는 청년이 내 바지에 국물을 쏟았을 때, 나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청년의 부주의함을 탓하며 식당의 서비스 수준을 매기고 있었다. 화를 내지 않은 건 내 아량이 넓어서가 아니라,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내 작가적 품격이 깎일까 봐 계산기를 두드린 결과였다. 나는 친절을 베푼 게 아니라, 친절해 보이는 나를 연기했을 뿐이다.
가끔은 이런 내 모습이 지독하게 혐오스럽다가도, 또 금세 인간이 다 그렇지 뭐 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런 양가적인 감정들이 내 안에서 뒤엉켜 싸운다. 원고료 몇 푼에 마음이 출렁이다가도, 폐지 수레를 미는 노인의 굽은 등을 보면 또 명치끝이 아릿해진다. 이 비효율적인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내가 아직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니라고 자위한다. 참으로 옹졸하고 편리한 위안이다.
이제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칭호를 억지로 붙들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대단한 고해성사를 할 용기도 없다. 그저 내 안의 이기심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내 동정이 얼마나 차가운 연극인지를 가끔씩 꺼내 볼 뿐이다. 수필은 나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비누가 아니라, 내 영혼에 묻은 얼룩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어야 할 것 같다.
소래산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저녁노을은 선과 악의 경계를 지우며 산 전체를 흐릿하게 물들인다. 내 안의 양과 늑대도 화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서로를 으르렁거린다. 아마 평생 이렇게 싸우며 살 것이다.
산 아래 내려오니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 미안함과 반가움, 그리고 여전한 피로감이 뒤섞인 묘한 기분으로 아내에게 다가간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문다. 그 말조차 또 다른 연기처럼 느껴져서다. 나는 그저 아내의 가방을 묵묵히 받아 든다. 거울 속의 그놈이 여전히 나를 비웃고 있지만, 오늘은 그냥 이 무거운 가방의 무게를 느끼며 걷고 싶을 뿐이다.
내일의 나는 또 어떤 비겁한 변명을 준비하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저 발끝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가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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