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머니의 안마당에서 배운 인생의 밀도에 관하여
안마당 작은 화단은 계절의 소란이 잠시 머물다 가는 정거장이었다. 그곳엔 늘 볕을 정수리까지 받아낸 채송화와 봉선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고, 담벼락을 따라 제 키를 과시하는 달리아가 파수꾼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꽃들은 유독 서둘렀다. 흙의 기운을 빨아올려 선명한 빛깔을 내뱉고는, 한 차례 소나기에도 제 생의 전부였던 꽃잎을 미련 없이 떨구어냈다.
어느 뙤약볕 아래였던가. 할머니는 흙 묻은 내 고사리손에 매끄러운 조약돌 하나를 쥐여주셨다. 그리고는 꽃씨를 심듯, 눅눅한 흙 안쪽 깊숙이 그 돌을 묻으라 하셨다.
“돌도 자란단다. 얘야, 저 단단한 몸뚱어리 안으로 빛과 물을 밀어 넣으면,
꽃보다 깊은 결이 자라나는 법이지.”
어린 마음에도 그것은 고요한 역설이었다. 뿌리도, 숨구멍도 없는 돌이 어떻게 자란단 말인가. 하지만 할머니는 진지했다. 매일 아침 꽃밭에 물조로를 기울일 때마다, 할머니는 잊지 않고 내가 돌을 묻은 자리 위로도 굵은 물줄기를 건네셨다. 축축하게 젖은 흙이 해를 만나 비릿한 숨을 내뱉을 때면, 나는 정말로 그 흙 밑에서 돌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듣는 듯했다.
세월은 안마당의 화단을 허물고 나를 세상의 한복판으로 밀어냈다. 나는 오랫동안 '꽃'을 피워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살았다. 눈에 보이는 성과와 타인의 박수라는 화려한 꽃잎을 얻기 위해 생의 수분을 남김없이 소진했다. 그러나 꽃의 시간은 가혹했다. 절정은 짧았고, 낙화(落花) 이후의 침묵은 감당하기 어려운 허무였다. 꽃을 심는 일은 결국 지는 것을 견디는 일이었음을, 생의 중턱을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 허기를 달래준 것은 수십 년 전 흙 속에 묻어둔 할머니의 돌이었다. 꽃이 외형의 팽창을 통해 자기를 증명한다면, 돌은 안으로의 수렴을 통해 자기를 완성한다. 돌이 자란다는 것은 부피의 확장이 아니라 밀도의 깊어짐이다. 비바람을 제 몸 안으로 받아내고, 흐르는 시간을 무겁게 누르며, 돌은 비로소 풍경의 일부가 된다. 겉모양은 그대로인 듯 보이나, 수만 번의 일몰을 통과한 돌은 이미 이전의 무기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내로 빚어진 하나의 영성(靈性)이다.
원고지라는 척박한 밭 위에 문장을 심는 지금, 나는 다시 그 안마당으로 돌아간다. 글을 쓰는 행위는 당장 향기를 내뿜는 꽃을 피우는 일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라는 내 안의 돌에게 매일 한 바가지의 사유(思惟)를 건네는 의식이다. 조바심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나는 돌의 시력을 빌려 세상을 본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에 실려 온 잡초일 뿐, 그 뿌리 아래를 받치고 있는 돌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제 내 마음의 화단에는 이끼 덮인 채 버려진 듯한 돌 하나가 놓여 있다. 세상의 시선으로는 무용(無用)하고 정지된 존재일지 모르나, 나는 안다. 내가 통과해 온 고통의 습기가 그 돌의 결을 따라 흐르며, 보이지 않는 지하에서 별나라 무지개 꽃밭까지 이어지는 단단한 생명선을 뻗고 있음을. 돌은 자란다. 다만 우리가 그 속도를 읽어낼 만큼 충분히 고요해지지 못했을 뿐이다.
내일 아침에도 나는 다시 바카라상 앞에 앉아 정성껏 물을 길어 올릴 것이다. 내 안의 예쁜 돌이, 보이지 않게 한 뼘 더 깊어질 수 있도록. 그리하여 오래전 할머니가 들려주신 그 다정한 목소리를 문장 너머로 다시 불러내 본다.
내 예쁜 돌을 아끼거들랑
채송화랑 봉선화랑 키다리 달리아랑
곱게 핀 꽃밭 한복판
고사리손 토닥여 깊이 심어두렴
봄, 여름, 가을도 다 가고
낙엽 지고 꽃잎마저 저버려
빈 가지에 찬바람만 울더라도
내일 다시 밝은 해가 뜨거든
너는 예쁜 돌 위에
마르지 않는 샘물 길어 뿌려주렴
어느덧 깊은 산사에
낮은 목탁 소리 들려올 때면
네 서러운 눈물도 절로 지리니
보이지 않게 자라는 돌처럼
그저 참고 기다리렴
굳은 땅 헤집고 나온 잡초조차
모진 바람에 흔들리며 사나니
보이지 않게 자라는 저 돌처럼
너도 참고 기다려보렴
(지금은 별이 되신 할머니의 말씀
그 돌은 이끼 덮여 풀밭에 버려졌어도)
네 눈물 여태 마르지 않았거든
저 별나라 무지개 꽃밭에
그 돌, 여전히 자라고 있다 믿으렴
그 돌 속에서 네 마음 자라고 있다 생각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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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바카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