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원하고, 누가 기다리며, 누가 거절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권력이 있다. 이 말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사랑은 평등해야 하고, 섹스는 서로 좋아서 하는 것이며, 연인 사이에 무슨 권력이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관계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권력은 아주 미묘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누가 먼저 연락하는가. 누가 더 많이 기다리는가. 누가 더 자주 섹스를 원하는가. 누가 거절할 수 있는가. 누가 관계가 끝날까 더 두려워하는가.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누가 더 쉽게 떠날 수 있는가. 권력은 반드시 명령하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떠날 수 있는 사람에게도 권력이 있고, 덜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힘이 생기기도 한다.
미셸 푸코는 권력을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는 단순한 물건처럼 보지 않았다. 권력은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가족에도 있고, 학교에도 있고, 병원에도 있고, 종교에도 있고, 연애에도 있다. 그리고 권력은 꼭 폭력적인 얼굴로 나타나지 않는다. 말 한마디. 침묵. 기다리게 하는 것. 답장을 늦게 하는 것. 애정을 주었다 거두는 것.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면서도 일부러 주지 않는 것. 이런 것들도 관계의 힘을 만들 수 있다.
연애에서 가장 이상한 권력은 더 많이 원하는 사람이 약자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더 보고 싶다. 더 자주 연락하고 싶고, 더 많이 안고 싶고, 더 확실한 관계를 원한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 순간 관계의 균형이 기울기 시작한다. 덜 원하는 사람이 관계의 속도를 결정한다. “오늘은 안 돼.” “나중에 연락할게.” “지금은 이런 관계가 좋아.” 더 많이 원하는 사람은 그 말에 맞추게 된다. 사랑에서는 이상하게도 가장 뜨거운 사람이 가장 약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사랑에서 자신의 욕망을 숨긴다.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들키면 지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먼저 연락하고 싶지만 참는다. 보고 싶지만 기다린다. 상대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확인하려고 일부러 거리를 둔다. 사랑이 어느 순간 감정의 줄다리기가 된다. 누가 더 오래 버티는가. 누가 먼저 연락하는가. 누가 먼저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가. 그때 사랑은 만남이 아니라 권력 게임이 된다.
프랑스 슬롯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권력이 슬롯의 습관과 몸에까지 스며든다고 보았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어떤 사람은 적극적이어야 하고 어떤 사람은 기다려야 한다는 역할을 배운다. 남자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여자는 너무 쉽게 응하면 안 된다. 남자는 많이 원해야 하고, 여자는 적당히 밀고 당겨야 한다. 이런 오래된 규범들은 욕망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어렵게 만든다. 두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각자의 성 역할을 연기하게 만든다. 욕망이 아니라 역할이 섹스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이 역사적으로 남성의 욕망 속에서 ‘타자’로 자리 잡아온 구조를 비판했다. 남자는 욕망의 주체이고, 여자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구조. 이 구조 안에서는 여성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은 중요하지만 여성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불편하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욕망을 말하는 순간 대상이 주체로 바뀌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원해.” 이 문장은 생각보다 강하다. 그 여성이 더 이상 누군가에게 선택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선택을 가진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관계에서 권력은 단순히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지 않는다. 여성이 더 큰 권력을 가질 수도 있고, 남성이 더 의존적일 수도 있다. 돈이 많은 사람. 슬롯적 지위가 높은 사람. 나이가 많은 사람. 경험이 많은 사람. 유명한 사람. 상대가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더 잘 아는 사람. 이 모든 것이 관계의 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누가 남자인가, 누가 여자인가”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이 관계에서 누가 더 자유롭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섹스에서 특히 중요하다. 겉으로는 서로 동의한 관계처럼 보여도 권력 차이가 크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상사와 부하 직원. 교사와 학생. 상담자와 내담자. 성직자와 신도. 경제적으로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과 그 생활을 바카라임지는 사람. 이런 관계에서는 “싫으면 싫다고 했으면 되잖아”라는 말이 충분하지 않다. 거절했을 때 잃을 것이 너무 많다면 그 동의가 얼마나 자유로운지 물어야 한다. 동의는 단순히 입으로 “예”라고 말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요”라고 말해도 안전했는가의 문제다.
여기에서 푸코의 권력 개념은 다시 중요해진다. 권력은 폭력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때로는 상대가 스스로 순응하게 만든다. 온라인 게임을 잃기 싫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공동체에서 버림받기 싫어서.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어서. 존경하는 사람에게 실망을 주기 싫어서. 사람은 이런 이유로 자기 마음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친밀한 관계에서 윤리는 상대가 무엇을 말했는지만 보지 않는다. 그 말을 어떤 조건에서 할 수 있었는지까지 본다.
권력은 성적 욕망의 크기에서도 생긴다. 한 사람은 자주 원한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이상한 일이 생길 수 있다. 많이 원하는 사람이 계속 부탁하는 사람이 되고, 덜 원하는 사람은 허락하는 사람이 된다. 섹스가 대화가 아니라 협상으로 바뀐다. “이번에는 해줘.” “지난주에도 안 했잖아.” “그럼 언제 할 건데?” 이런 언어가 반복되면 한 사람은 점점 압박을 느끼고 다른 한 사람은 점점 거절당한다는 상처를 느낀다. 둘 다 외롭다. 그리고 섹스는 더 어려워진다.
반대의 권력도 있다. 성적인 친밀함을 상대를 통제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내 말 들으면 가까이해줄게.” “화해하기 전까지 손도 대지 마.” 물론 싸운 뒤 섹스를 원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몸을 의도적으로 보상과 처벌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다. 친밀함이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관계를 통제하는 화폐가 되는 것이다. 몸이 협상의 카드가 되는 순간 에로티시즘은 권력으로 변한다.
질투에서도 권력이 드러난다. 우리는 종종 질투를 사랑의 깊이로 생각한다. “저렇게 질투하는 걸 보니 정말 사랑하나 봐.” 하지만 질투가 통제로 바뀌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구를 만나는지 확인하고, 휴대폰을 검사하고, 옷차림을 지시하고, 친구 관계를 제한하고, 계속 위치를 확인하는 것. 이런 행동은 사랑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자유를 줄이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사랑은 상대가 떠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다. 떠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쉽지 않다. 사람은 사랑하면 불안해진다. 그 사람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유하고 싶어진다. 내 사람이라는 표시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이 사랑과 소유를 구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은 “당신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답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프롬에게 사랑에는 존중이 있다. 존중은 상대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은 이 지점에서 더 급진적이다. 타인은 끝내 내가 소유할 수 없는 존재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가까워도.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살아도. 타인은 타인이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이 사실을 자꾸 잊는다. “내 여자.” “내 남자.” “내 배우자.” 물론 친밀한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진짜 소유권처럼 변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된다. 상대의 몸도, 시간도, 인간관계도, 생각도 내 것이 아니다. 사랑은 소유의 완성이 아니라 소유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시즘에서 경계를 넘는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경계를 넘는 것과 경계를 파괴하는 것은 다르다. 두 사람이 서로 원해서 자신의 경계를 열어주는 것과 한 사람이 힘으로 상대의 경계를 넘는 것은 전혀 다른 사건이다. 첫 번째에는 친밀함이 있지만 두 번째에는 침범이 있다. 에로티시즘은 자유가 있을 때 아름답다. 강요가 들어오는 순간 그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섹스에서 권력은 완전히 없어져야 할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간관계에서 권력의 차이를 완전히 제거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고, 능력도, 경험도, 슬롯적 위치도, 감정의 크기도 다르다. 중요한 것은 차이가 없느냐가 아니라 그 차이를 이용하느냐이다. 내가 상대보다 강한 위치에 있을 때 그 힘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는가. 아니면 상대가 더 안전하게 말할 수 있도록 내 힘을 스스로 낮추는가. 권력이 있다는 사실보다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
좋은 관계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더 조심한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내가 더 많이 경험했으니 내 말이 맞아.”라고 하지 않는다. 돈이 많은 사람이 “내가 해준 게 있는데.”라고 하지 않는다. 종교적 권위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도 이것을 원하신다.” 며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상대보다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자신의 말 한마디가 상대에게 얼마나 무겁게 들리는지 알아야 한다.
특히 종교에서는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 종교 지도자의 권위는 일반적인 슬롯적 권력과 조금 다르다.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의 말을 개인의 의견보다 더 크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의 뜻. 축복. 죄. 순종. 영적 권위. 이런 언어가 성적 관계에 이용되면 상대는 단순히 한 사람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종교적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훨씬 더 엄격한 윤리가 필요하다. 신앙은 타인의 몸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멀리 물러설 바카라임을 준다.
예수의 권력 사용은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권위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 힘이 없던 사람에게 자리를 내준다. 어린이. 병든 사람. 여성. 가난한 사람. 슬롯적으로 배제된 사람. 예수가 보여준 힘의 방향은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힘보다 힘없는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에 가깝다. 기독교가 사랑과 성에 대해 말하려면 이 권력의 방향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의 유명한 말씀 가운데 이런 정신이 있다. 큰 사람이 되고 싶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원리는 친밀한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사랑에서 힘이 있다는 것은 상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힘을 상대의 자유를 위해 사용한다는 뜻이다.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면 상대를 조종하기보다 더 잘 설명한다. 내가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를 의존시키기보다 더 독립적으로 살 수 있게 돕는다. 내가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가 나에게 “아니요”라고 말하기 쉽게 만든다. 사랑의 힘은 타인의 자유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넓혀주는 힘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문장도 이 지점에서 다시 읽어볼 수 있다. 사랑에는 욕망이 있다. 나도 무언가를 원한다. 하지만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야만 유지되는 관계가 아니다. 때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는다. 상대가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미학적으로도 힘은 흥미로운 문제다. 춤을 생각해 보자. 어떤 춤에서는 한 사람이 리드하고 다른 사람이 따른다. 그러나 좋은 춤에서 리드는 상대를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움직임을 제안한다. 그리고 상대는 그 제안에 응답한다. 두 사람 모두 움직인다. 좋은 리더는 파트너의 몸을 통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가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든다. 섹스도 비슷할 수 있다. 주도함과 지배함은 같은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조금 더 적극적일 수 있다. 먼저 다가갈 수도 있고, 분위기를 이끌 수도 있다.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상대의 반응을 읽지 않는 것이다. 좋은 주도에는 상대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올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으며,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그 선택권이 살아 있을 때 주도는 에로티시즘이 될 수 있다. 선택권이 사라지면 주도는 지배가 된다.
그래서 나는 좋은 섹스에 ‘힘의 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상대보다 더 강한 위치에 있는가. 내 말이 상대에게 압박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상대가 정말 원하는가. 아니면 나를 실망시키기 싫어서 따라오는가. 이런 질문은 분위기를 망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를 안전하게 만든다.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권력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내려놓을 줄 아는 상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영향력을 갖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말 하나가 그 사람의 하루를 바꿀 수 있다. 내 침묵 하나가 그 사람을 밤새 불안하게 할 수도 있다. 내 관심 하나가 그 사람에게 큰 기쁨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바카라임도 생긴다.
어떤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그 마음을 이용한다. 헤어질 듯 말한다. 관심을 거둔다. 질투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을 일부러 언급한다. 그러면 상대가 더 매달린다. 그것을 사랑받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확인이 아니라 불안을 이용한 권력일 수 있다.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상대를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좋은 사랑에서는 상대를 일부러 굶기지 않는다. 관심을 굶기고, 확신을 굶기고, 애정을 굶겨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내 마음을 얻기 위해 계속 시험을 통과하지 않아도 돼.” 그런 관계에서는 상대가 나에게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관계에서 사람은 더 자유롭게 머물 수 있다. 성적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상대가 나를 필요로 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나를 자유롭게 선택하기를 원하는가. 둘은 다르다. 필요해서 떠나지 못하는 것과 떠날 수 있지만 머무는 것은 다르다. 사랑의 아름다움은 후자에 있다.
종교적 언어로 말한다면 하느님조차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는 전통적 신학적 사유를 떠올릴 수 있다. 사랑에 자유가 없다면 그 사랑은 무엇인가. 강제로 믿게 하고, 강제로 사랑하게 하고, 강제로 순종하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과 거리가 멀다. 인간 사이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상대를 붙잡는 힘보다 상대가 자유롭게 머물도록 하는 힘에 가깝다. 우리는 때때로 상대를 놓아주면 잃을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더 붙잡는다. 더 확인한다. 더 요구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움켜쥐면 사랑은 숨을 쉬지 못한다. 손을 생각해 보자. 주먹을 꽉 쥐면 무언가를 붙잡을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새롭게 만질 수 없다. 사랑에는 어느 정도 열린 손이 필요하다. 이 열린 손은 무관심이 아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깊은 신뢰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그래서 당신을 붙잡고 싶다. 하지만 당신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사실까지 사랑하겠다. 어쩌면 이것이 사랑에서 가장 어려운 태도인지 모른다.
섹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아름다운 친밀함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순간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의 힘을 내려놓는 순간일 수 있다. 나는 당신 앞에서 강한 척하지 않아도 되고, 당신도 내 앞에서 약한 척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역할을 내려놓는다. 성과를 내려놓고, 비교를 내려놓고, 소유하려는 마음도 조금 내려놓는다. 그리고 서로에게 말한다. “여기에서는 당신이 자유로워도 괜찮아.”
나는 그것을 열네 번째 섹스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랑에는 힘이 있다. 욕망에도 힘이 있다. 몸에도 힘이 있고, 거절에도 힘이 있다. 문제는 힘의 존재가 아니다. 그 힘이 상대를 작게 만드는가, 아니면 더 자유롭게 만드는가. 좋은 사랑은 상대를 나에게 종속시키지 않는다. 좋은 섹스도 상대의 자유를 줄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순간에도 두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남을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사랑의 가장 성숙한 고백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을 원한다. 하지만 당신을 지배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더 깊은 고백. “나를 선택해 주기를 바라지만 나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까지 당신에게 있다.” 그 자유 앞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것. 나는 거기에 욕망보다 더 깊은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유하지 않으면서 가까워지는 힘. 붙잡지 않으면서 머물게 하는 힘. 상대를 작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더 자기 자신이 되게 하는 힘. 그것이 어쩌면 사랑이 권력을 넘어서는 방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