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데 왜 섹스가 사라질까

익숙함은 사랑을 깊게 하지만, 때로 욕망을 잠들게 한다

byNavyblue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걱정한다. 아프면 마음이 쓰이고, 늦게 들어오면 기다리고, 좋은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다. 가족보다 가까운 사람이고 어쩌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손을 잡는 것은 편한데 키스는 줄었다. 같은 침대에서 잠들지만 서로를 만지는 일은 드물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묻게 된다. “우리는 아직 사랑하는데, 왜 서로를 원하지 않게 되었을까?” 많은 연인과 부부에게 이 질문은 생각보다 아프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랫동안 사랑과 욕망이 함께 움직인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사랑이 깊으면 욕망도 깊어야 하고, 섹스가 줄어들면 사랑도 식은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랑과 욕망은 가까운 친척이지만 쌍둥이는 아니다.


에스더 페렐은 장기적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 역설을 흥미롭게 설명한다. 사랑이 원하는 것과 욕망이 원하는 것이 때때로 다르다는 것이다. 사랑은 가까움을 원한다. 안전함. 익숙함. 예측 가능함. 신뢰. 나는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고, 당신이 내일도 곁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원한다. 반면 욕망에는 조금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새로움. 긴장. 호기심. 예측할 수 없음. 그리고 약간의 거리. 사랑은 말한다. “당신을 완전히 알고 싶어.” 그런데 욕망은 가끔 말한다. “당신에게 아직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었으면 좋겠어.” 바로 이 모순이 오래된 사랑을 어렵게 만든다.

image.png“당신에게 아직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었으면 좋겠어.”

연애 초기에는 모든 것이 미지의 세계다. 메시지가 언제 올지 모른다. 다음에는 언제 만날지도 모른다. 손을 잡을 수 있을까. 키스하게 될까. 그 사람도 나를 원하는 걸까. 불확실하다. 그리고 바로 그 불확실성 속에서 상상력이 작동한다. 보고 싶다. 기다린다. 상상한다. 욕망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많은 것이 확실해진다. 어디에서 자는지 알고, 어떤 잠옷을 입는지 알고, 아침에 어떤 얼굴인지 알고, 화가 나면 어떤 말을 하는지도 안다. 사랑은 깊어지지만 신비는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말한다. “나는 저 사람을 다 알아.” 그 문장이 욕망에게는 조금 위험하다.


욕망은 모르는 것에 끌리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현대 슬롯에서 타자의 낯섦과 거리가 사라질 때 에로스 역시 약화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타인이 더 이상 나와 다른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라 내가 모두 파악한 존재가 되는 순간 매혹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일 수 있다. 우리는 상대를 너무 잘 알고 있다.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어떤 반응을 할지 알고, 심지어 언제 섹스를 요구할지도 안다. 욕망에게 가장 위험한 문장은 어쩌면 “뻔해.” 일지도 모른다.


연애 초기의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여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랑을 할까. 나와 함께 있을 때 어떤 모습일까. 그러나 오래 함께 살다 보면 상대를 하나의 역할 안에 넣어버린다. 남편. 아내. 아이 아빠. 아이 엄마. 생활비를 내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쓰레기 버리는 사람. 운전하는 사람. 우리는 함께 삶을 꾸리기 위해 역할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을 역할로만 보기 시작하면 에로티시즘은 조금씩 사라진다. 나는 어느 순간 연인을 보지 않고 가족 구성원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연애할 때 그렇게 바라보던 사람이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면 소파에서 과자를 먹으며 휴대폰을 보고 있는 너무 익숙한 사람이 된다. 처음에는 손만 닿아도 떨렸는데 이제는 침대에서 서로의 등을 보며 각자 휴대폰을 본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랑이 너무 일상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성 연구자 로즈메리 배슨의 연구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성욕을 흔히 갑자기 발생하는 충동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욕망하고, 그다음 가까워지고, 그다음 흥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욕망은 그렇게 직선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강한 욕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편안한 대화, 애정 어린 접촉, 정서적인 연결,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욕망이 깨어나기도 한다. 즉, 욕망이 생겨야 가까워지는 것만이 아니라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이 차이를 모르면 오래된 관계에서 쉽게 오해가 생긴다. “왜 나한테 예전처럼 하고 싶어 하지 않아?” 상대는 대답한다. “모르겠어. 그냥 그런 생각이 안 나.”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불안해진다. 하지만 욕망이 저절로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보다 욕망이 깨어날 수 있는 관계적 공간이 사라진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도 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아이를 돌보고, 청소하고, 밀린 메시지를 확인하고, 경제적인 문제를 의논하고, 서로에게 서운했던 일을 참고, 밤 11시 반에 침대에 누운 뒤 갑자기 에로틱한 인간으로 변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몸에는 스위치가 없다.

image.png몸에는 스위치가 없다.

특히 관계 안에 쌓인 감정은 몸에 들어온다. 낮에 무시당한 마음. 계속되는 잔소리. 해결되지 않은 싸움. 가사와 돌봄의 불균형. 상대에게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 이런 감정은 침실 문 앞에 내려놓고 들어갈 수 없다. 몸은 기억한다. 그래서 섹스가 사라졌을 때 성욕만 고치려고 하면 문제를 놓칠 수 있다. 질문은 이것일 수 있다. “우리의 몸 사이에 무엇이 쌓여 있는가.”


존 가트맨의 부부 연구가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것도 일상의 작은 정서적 연결이다. 관계는 특별한 이벤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상대가 말을 걸었을 때 바라봐주는 것. 하루가 어땠는지 묻는 것. 사소한 관심 요청에 반응하는 것. 감사하는 것. 이런 작은 연결들이 쌓여 관계의 정서를 만든다. 섹스도 그 관계 밖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낮에는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가 밤에는 뜨거운 친밀감을 기대하기 어렵다. 어쩌면 전희는 침실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아침의 한마디에서 시작될 수 있다. “잘 잤어?” 저녁의 질문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오늘 많이 힘들었지?” 욕망은 때때로 하루 종일 대접받은 방식의 결과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한다. “잘해주면 섹스를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시 거래가 된다. 설거지를 했으니 섹스. 선물을 줬으니 섹스. 친절했으니 섹스. 사랑은 포인트 적립제가 아니다. 상대를 잘 대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적 안전함 속에서 욕망이 살아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는 뜻이지, 친절이 섹스에 대한 권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욕망이 사라지는 또 다른 이유는 상대를 너무 가까이 붙잡아두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린다. 사랑하면 가까워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사랑에는 가까움뿐 아니라 거리도 필요하다. 에스더 페렐은 상대를 다시 욕망하게 되는 순간에 대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언제 배우자가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가. 많은 사람은 상대가 자신과 떨어져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과 자신 있게 이야기할 때, 무언가에 몰입해 있을 때, 자기가 잘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새롭게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왜일까. 그 순간 상대가 다시 ‘내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래된 사랑은 자칫 상대를 소유물처럼 느끼게 한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연인. ‘내’라는 말이 사랑스럽지만 그 말 뒤에서 상대의 독립성이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욕망은 상대가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생긴다. 내가 다 알 수 없는 사람. 나 없이도 자기 세계를 가진 사람. 내가 소유할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을 다시 발견하는 순간 익숙한 얼굴에서 낯선 아름다움이 보인다.


마르틴 부버의 표현을 빌리면 오래된 관계의 위험은 ‘너’가 다시 ‘그것’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한 존재를 만났다.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을 하나의 기능으로 보기 시작한다. 남편이 해야 할 일. 아내가 해야 할 일. 연인이 당연히 해야 할 일. 상대가 더 이상 경이로운 ‘너’가 아니라 익숙한 ‘그것’이 된다. 욕망을 되살린다는 것은 화려한 이벤트보다 먼저 상대를 다시 ‘너’로 바라보는 일일 수 있다.

image.png욕망을 되살린다는 것은 화려한 이벤트보다 먼저 상대를 다시 ‘너’로 바라보는 일일 수 있다.

“나는 저 사람을 다 안다.” 정말 그럴까. 20년을 함께 살아도 한 사람 안에는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 혼자 있는 시간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요즘 무엇이 두려운지, 어떤 꿈을 포기했는지,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 사람은 계속 변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래 사랑했다는 이유로 과거의 상대를 현재의 상대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욕망을 회복하는 좋은 질문은 “왜 예전 같지 않아?”가 아니라 “요즘 당신은 어떤 사람이야?” 일지도 모른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인은 언제나 내가 완전히 포획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나는 이 생각이 오래된 사랑에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내가 모르는 부분을 남겨두는 것. 그 사람의 내면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 이런 태도는 사랑에 다시 신비를 돌려준다. 욕망은 낯선 사람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익숙한 사람 안에서 다시 낯선 사람을 발견할 때도 생긴다.


데이비드 슈나크는 장기적인 관계에서 친밀함을 단순히 서로에게 융합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유지하면서 상대와 가까워질 수 있는 능력, 즉 분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연애에도 아주 중요하다. 사랑한다고 모든 것을 함께할 필요는 없다. 같은 취미. 같은 친구. 같은 시간. 같은 생각. 모든 것을 공유해야만 친밀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각자의 세계가 있어야 다시 만날 이야기가 생긴다. 혼자 읽은 바카라. 혼자 걸었던 거리. 자기만의 일. 친구들과 보낸 시간. 혼자 생각한 것. 그리고 다시 만나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라고 말한다. 헤어져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다시 만나는 순간도 존재한다.


미학에서도 거리는 중요하다. 그림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붓 자국밖에 보이지 않는다. 조금 떨어져야 전체가 보인다. 음악에도 음과 음 사이의 간격이 있다. 시에도 여백이 있다. 모든 곳을 채우면 아름다움은 오히려 사라진다. 사랑도 그럴 수 있다.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고, 모든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의 일정을 모두 알고, 모든 인간관계에 들어가 있는 것. 그것을 친밀함이라고 부르지만 어쩌면 너무 가까워서 상대가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에로티시즘에는 약간의 거리와 기다림이 필요하다. 보고 싶을 시간. 상상할 시간.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을 떠올릴 시간. 연애 초기에는 자연스럽게 있었던 것들이다. 그런데 오래된 관계에서는 그 시간을 의식적으로 만들어야 할 때도 있다. 사랑을 위해 함께 있는 것만큼 잠시 떨어져 각자의 사람이 되는 것도 필요하다.


기독교의 사랑은 종종 ‘하나 됨’이라는 언어로 설명된다. 창세기는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룬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표현이다. 그러나 ‘한 몸’이 한 사람이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성서의 사랑에서도 관계 안에는 여전히 두 인격이 존재한다. 한 사람의 의지가 다른 사람에게 흡수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신비는 둘이 사라지고 하나만 남는 데 있지 않다. 둘이면서 함께 있는 데 있다. 삼위일체라는 기독교적 상징조차 일치와 차이를 동시에 말한다. 사랑은 차이를 없애지 않는다. 차이 안에서 관계를 만든다.


『아가서』에서도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는 흥미로운 거리가 있다. 찾는다. 기다린다. 부른다. 그리워한다. 상대는 언제나 바로 내 옆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부재가 있고, 탐색이 있고, 만남이 있다. 그래서 사랑은 살아 움직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움은 욕망의 오래된 언어다. 종교는 때로 욕망이 줄어드는 것을 더 거룩한 상태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육체적 욕망보다 정신적인 사랑이 더 높은 단계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육체적으로 끌리는 것은 저급한 사랑이 아니다. 동시에 성적 욕망이 약해졌다고 해서 그 사랑이 거짓인 것도 아니다. 몸에는 계절이 있다. 삶에도 계절이 있다. 질병, 출산, 갱년기, 스트레스, 우울, 수면 부족, 약물, 노화. 수많은 이유로 욕망은 달라질 수 있다. 그 변화 앞에서 도덕적 판정을 먼저 내릴 필요는 없다.


“왜 나를 원하지 않아?”라는 질문보다 “요즘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지?”라고 물어볼 수 있다면 좋겠다. 첫 번째 질문에는 나의 상처가 중심에 있다. 두 번째 질문에는 상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물론 거절당하는 사람의 서운함도 진짜다. 성적 친밀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지속적인 거절은 깊은 외로움이 될 수 있다. 그 감정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욕망이 많은 사람에게 “그것밖에 모르냐”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적이고, 욕망이 적은 사람에게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적이다. 둘의 욕망에는 누가 더 옳다는 판결보다 대화와 조율이 필요하다.


때로는 섹스가 사라진 관계에서 서로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는다. 원하는 사람은 계속 거절당할까 봐 더 이상 다가가지 않는다. 원하지 않는 사람은 다가오면 또 거절해야 할까 봐 스킨십 자체를 피한다. 손을 잡으면 상대가 섹스를 기대할까 봐 손조차 잡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성관계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키스도, 포옹도, 손길도 사라진다. 몸 전체가 협상장이 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섹스 이전의 접촉을 회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성과 연결되지 않아도 되는 포옹. 그냥 손을 잡는 것. 어깨를 주무르는 것. 소파에서 기대는 것. 키스를 했다고 반드시 다음 단계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안전감. 몸이 다시 배워야 한다. 모든 접촉이 요구는 아니라는 것을. 그 안전함 속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욕망이 천천히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욕망을 너무 거대한 사건으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 불꽃이 다시 타올라야만 한다고 생각하면 부담이 생긴다. 연애 초기의 강렬함을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생각도 비현실적일 수 있다. 오래된 사랑의 에로티시즘은 처음의 에로티시즘과 다를 수 있다. 젊은 사랑이 불꽃이라면 오래된 사랑은 오래 피워온 난로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매 순간 활활 타지는 않는다. 그러나 불씨는 남아 있다. 가끔 장작을 넣고, 바람을 통하게 하고, 불씨를 살피면 다시 따뜻해진다.

image.png연애 초기의 강렬함을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생각도 비현실적일 수 있다.

사랑도 관리가 필요하고 욕망도 돌봄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노력’이라는 말을 의무처럼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이번 주에는 반드시 해야 한다.” 이런 식의 숙제가 되어버리면 욕망은 더 숨을 수 있다. 욕망은 명령을 싫어한다. 오히려 호기심이 필요하다. 우리가 예전에 무엇을 좋아했지. 요즘은 무엇이 달라졌지. 나는 당신의 어떤 모습에 다시 끌리는가. 우리 둘만의 시간을 언제 마지막으로 가졌지. 이런 질문이 시작이다. 그리고 때로는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욕망이 변했다는 것을. 그 사실 자체를 실패라고 부르지 않는 것. 사람은 변한다. 몸도 변한다. 관계도 변한다. 중요한 것은 예전의 관계를 억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친밀함을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20대의 사랑과 50대의 사랑이 똑같아야 할 이유는 없다. 몸이 달라지고, 삶의 무게가 달라지고, 사랑의 언어도 달라진다. 예전에는 격렬한 밤이 사랑이었다면 어떤 날에는 서로의 등을 마사지해 주는 시간이 더 깊은 친밀함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또 어느 날 예상하지 못했던 욕망이 돌아올 수도 있다. 사람의 몸에는 계절이 있다. 욕망에도 봄과 겨울이 있다. 겨울이 왔다고 나무가 죽은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문장을 오래된 연인들에게 꼭 말하고 싶다. 섹스가 줄었다고 무조건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하니까 섹스가 없어도 아무 문제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두 사람이 모두 괜찮다면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외롭다면 그 외로움은 이야기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슬롯가 정한 횟수가 아니다. 두 사람이 지금의 관계에서 함께 괜찮은가. 그것이 기준이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할 때 상대를 심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 안 해?” 보다 “우리 요즘 몸이 좀 멀어진 것 같아. 당신은 어떻게 느껴?” “나도 당신을 압박하고 싶지는 않은데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있어.” 이런 말이 훨씬 어렵지만 훨씬 사랑에 가깝다. 비난은 몸을 닫게 하고, 호기심은 몸을 열 수 있다.


신앙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사랑은 끊임없는 새로움의 사건일지도 모른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는 성서의 언어처럼 관계에서도 과거의 사랑만 붙잡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오래된 얼굴 안에서 새로운 얼굴을. 익숙한 몸 안에서 오늘의 몸을.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아직 모르는 이야기를.


사랑하는데 왜 섹스가 사라질까.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익숙함 때문일 수도 있고, 갈등 때문일 수도 있고, 피로 때문일 수도 있으며, 건강이나 삶의 변화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두 사람이 너무 가까워져 서로를 더 이상 타인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섹스를 회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횟수를 늘리는 일이 아니다. 때로는 먼저 상대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다.


어느 날 카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배우자를 바라본다. 늘 보던 사람이다. 그런데 일부러 조금 낯설게 바라본다. 저 사람은 나를 만나기 전에도 수많은 시간을 살아온 사람이다. 내가 모르는 기억이 있고, 내가 들어가 보지 못한 마음의 방이 있으며, 나 없이도 꿈꾸는 것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 사람의 인생 가운데 한 부분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아내’, ‘내 남편’, ‘내 연인’이라는 이름 뒤에서 다시 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 욕망은 어쩌면 그 순간 다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당연한 사람이 다시 신비로운 사람이 되는 순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매일 나를 다시 선택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당신을 다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좋다. 아직 당신에게 내가 발견하지 못한 세계가 있다는 것.


나는 그것을 열두 번째 섹스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랑이 오래된다고 욕망이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욕망의 방식이 달라질 뿐이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에게 끌렸다면, 오래된 사랑에서는 익숙한 사람을 다시 낯설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가까이 가고, 때로는 조금 떨어지고, 각자의 세계를 살아본 뒤 다시 서로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이렇게 묻는 것. “나는 당신을 오래 사랑했지만 오늘의 당신은 아직 다 알지 못해. 요즘 당신은 어떤 사람이야?” 그 질문이 살아 있는 관계에서는 사랑도 완성되지 않는다. 욕망도 완성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계속 변하고, 계속 발견하며, 계속 다시 만난다. 어쩌면 오래된 사랑의 가장 깊은 에로티시즘은 처음처럼 서로를 모르는 데 있지 않다. 오래 알고도 여전히 서로에게 궁금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익숙함 속에서도 욕망이 다시 숨을 쉬는 방법인지 모른다.

image.png사랑이 오래된다고 욕망이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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