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후에 더 외로워지는 사람들

몸은 가까워졌는데 왜 마음은 더 멀어질까

byNavyblue

몸은 가장 가까이 있었다. 서로의 체온을 느꼈고, 숨소리를 들었고, 평소에는 보여주지 않던 몸까지 보여주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끝난 뒤 이상하게 외롭다. 옆에는 분명 사람이 있는데 혼자 있는 것보다 더 혼자인 것 같다. 이런 순간이 있다. 몸은 만났는데 마음은 만나지 못한 것 같은 순간. 그래서 묻게 된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왜 나는 더 외로운 걸까.” 어쩌면 섹스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는 몸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마음의 거리도 자동으로 가까워질 것이라는 믿음인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몸의 친밀함과 마음의 친밀함은 같은 것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현대인이 사랑을 받는 문제에는 관심이 많지만 사랑하는 능력에는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선택받고 싶어 한다.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고, 욕망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 그런데 욕망받았다는 사실이 곧 사랑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누군가가 내 몸을 원했다. 나를 안았고, 키스했고, 가장 가까운 곳까지 들어왔다. 그래서 순간적으로는 내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다음 날 그 사람이 나의 마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몸은 선택받았지만 나는 선택받지 못했다는 감각이 남을 수 있다. 그때 섹스 뒤에 찾아오는 것은 충만함이 아니라 공허함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관계에서 타인의 시선이 우리를 대상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는 살아 있는 주체다.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는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예쁜 몸. 섹시한 몸. 매력적인 몸. 원하는 몸. 이 시선 자체가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그 시선 안에서 내가 오직 몸으로만 존재할 때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꿈꾸는지,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내 몸만 중요해진다면 가장 가까운 행위 안에서도 나는 깊이 대상화될 수 있다. 그래서 섹스 후에 느끼는 외로움에는 이런 질문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당신은 내 몸을 만난 것인가, 나를 만난 것인가.”

55ef92668a3557775c407b23fa14d19c.gif“당신은 내 몸을 만난 것인가, 나를 만난 것인가.”

마르틴 부버의 ‘나-너’와 ‘나-그것’이라는 구분은 이 질문을 더 분명하게 만든다.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상대는 나에게 필요한 기능을 가진 존재다. 외로움을 달래준다. 성적 욕망을 해결해 준다. 자존감을 높여준다. 잠시 현실을 잊게 해 준다. 그러나 ‘나-너’의 관계에서는 상대가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다가온다. 그 사람의 기쁨과 두려움과 자유가 중요해진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같은 침대에 있어도 관계의 종류는 전혀 다를 수 있다. 한 사람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외로움을 잠시 잊고 있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은 관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그 밤 하나의 경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몸은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섹스 후 외로움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의미의 불일치. 같은 행동에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의미를 붙이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섹스는 “우리가 더 깊어진다”는 뜻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지금 이 순간 서로 즐겁다”는 뜻일 수 있다. 둘 중 어느 하나가 반드시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그 차이를 모른 채 같은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데 있다. 그래서 관계에는 몸의 동의만큼 의미의 대화도 필요하다. “우리에게 이 관계는 어떤 의미야?” 이 질문은 로맨틱하지 않아 보이지만 마음을 지키는 중요한 질문일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가까워지고 싶지만 동시에 묶이고 싶지는 않은 현대인의 모순을 지적했다. 사람은 친밀함을 원한다. 하지만 바카라임은 부담스럽다. 연결되고 싶지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도 갖고 싶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관계를 시작하기보다 ‘연결’하는 것이 더 쉬워졌는지도 모른다. 메시지를 보내고, 만나고, 몸을 나누고,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상처받을 위험도 줄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상처를 피하기 위해 깊이를 포기하면 외로움 역시 깊어진다. 사람은 접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결이 많아진 시대를 산다. 수백 명의 연락처가 있고, SNS에서는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으며, 언제든 누군가와 대화할 수 있다. 그런데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일까. 외로움은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정말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도 외롭다. 섹스 후의 외로움도 비슷하다. 피부는 보여주었지만 마음은 보여주지 못했다. 혹은 마음까지 보여주었는데 상대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때 사람은 옷을 입고 있을 때보다 더 벌거벗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섹스에는 취약함이 들어 있다. 몸을 보여주는 것은 단지 피부를 드러내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은근히 많은 것을 걸고 있다. 내가 매력적으로 보일까. 내 몸을 싫어하지 않을까. 실망하지 않을까. 나는 잘하고 있는가. 이 사람이 나를 떠나지 않을까. 겉으로는 자신 있어 보여도 몸에는 이런 질문들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친밀한 관계를 나눈 뒤 상대가 갑자기 차가워지거나 멀어진다면 사람은 단순한 거절보다 더 깊은 상처를 느낄 수 있다. 가장 취약한 모습을 보여준 뒤 외면당했다는 감각이 남기 때문이다.


애착 연구도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람은 친밀함을 원하는 방식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가까워질수록 안정감을 느낀다. 반면 어떤 사람은 관계가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오히려 불안을 느끼고 거리를 두기도 한다. 그래서 같은 밤을 보낸 뒤 한 사람은 더 가까워지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은 갑자기 혼자 있고 싶어질 수 있다. 첫 번째 사람은 생각한다. “왜 갑자기 달라졌지?” 두 번째 사람은 생각한다. “왜 이렇게 가까워지려고 하지?” 둘 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식일 수 있다. 문제는 서로의 패턴을 모르고 상대의 행동을 사랑의 크기로 해석할 때 생긴다.


“섹스하고 나니까 연락이 줄었어.” 이 경험은 사람에게 자기 가치에 대한 의심을 만들기도 한다. 내가 별로였나. 내가 너무 쉽게 허락했나. 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건가. 특히 성을 둘러싼 슬롯적 이중 기준 속에서는 이런 상처가 더 커질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한다. 상대가 관계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내 존엄의 평가표가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함부로 대했다고 해서 내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무바카라임은 내 가치의 증거가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섹스가 깊은 사랑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관계를 선택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과 섹스를 깊게 연결하고, 어떤 사람은 둘을 비교적 분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다. 나는 정말 몸과 감정을 분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자연스럽게 깊어지는 사람인가. 다른 사람이 가능하다고 해서 나도 가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성향을 모른 채 ‘쿨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겉으로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안에서는 계속 무너질 수도 있다.


자유는 남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이다. 누군가는 가벼운 관계에서도 편안하다. 누군가는 성적 친밀함이 생기면 강한 정서적 유대가 뒤따른다. 둘 중 무엇이 더 성숙하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 “나는 이 관계 이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가.” “상대가 내일 떠나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까.” “나는 사실 섹스가 아니라 사랑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때로 가장 중요한 동의는 상대에게 하는 동의보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동의일지도 모른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는 문제를 깊이 고민했다. 그의 사유를 연애에 가져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나 자신을 배반하고 있지는 않은가. 상대가 떠날까 봐 원하지 않는 친밀함을 허용하는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하는가. 그렇다면 섹스가 끝난 뒤 외로운 것은 이상하지 않다. 몸은 함께 있었지만 그 순간 나는 나 자신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과 가까워지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관계는 결국 외로워진다. 이것은 종교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기독교는 때때로 자기 부인을 자기 소멸처럼 가르쳐왔다. 사랑하니까 참아야 한다. 희생해야 한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물론 사랑에는 희생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을 자기 존엄을 포기하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사랑은 자신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으로 서는 일과 연결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는 이미 전제가 하나 있다. 자기 자신도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내 몸을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 필요는 없다. 상대를 잃지 않기 위해 내 마음을 배신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존엄이 있다면 그 존엄은 연애와 섹스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종교가 성윤리를 이야기할 때 단순히 “하지 말라”만 말해서는 부족하다. 이 질문도 가르쳐야 한다. “이 관계 속에서 당신은 여전히 당신 자신인가.”


예수의 관계 방식에는 사람을 다시 주체로 세우는 장면이 많다. 슬롯는 사람을 이름표로 부른다. 죄인. 병자. 세리. 부정한 여자. 그러나 예수는 그 이름표 뒤의 사람을 본다. 나는 이것이 성적 관계에서도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을 성 경험으로, 몸으로, 연애 이력으로, 하룻밤의 선택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성적 경험보다 크다. 『아가서』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도 단지 육체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욕망이 상호적이기 때문이다. 둘 다 찾는다. 둘 다 말한다. 둘 다 원한다. 한 사람만 소비하고 한 사람만 소비되는 구조가 아니다. 몸의 친밀함 속에서도 서로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섹스 후에는 이런 감각이 남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사용된 것이 아니라 만나졌다.”


섹스 후에 더 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섹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외로움도 해결해 주고, 자존감도 회복시켜 주고, 사랑받는다는 확신도 주고, 관계의 불안도 없애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섹스는 그렇게 전능하지 않다. 몸은 잠시 가까워질 수 있지만 삶의 모든 결핍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동안 숨겨져 있던 결핍이 친밀함 이후 더 선명하게 보일 수도 있다.

53bd7ad8e2ae454cf360678917b488af.gif몸은 잠시 가까워질 수 있지만 삶의 모든 결핍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알랭 드 보통은 사랑에 관한 글들에서 우리가 연인에게 지나치게 많은 역할을 기대하는 현대적 상황을 자주 지적한다. 친구이면서, 연인이면서, 가족이면서, 상담자이고, 성적 파트너이며, 내 존재의 의미까지 확인해 주는 사람. 한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충족해 주기를 바란다. 그 기대는 너무 무겁다. 섹스 역시 마찬가지다. 섹스가 내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기를 바라면 상대의 반응 하나하나가 자존감의 시험지가 된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정말 섹스인가. 아니면 위로인가. 확신인가. 안심인가. 누군가 나를 선택했다는 감각인가.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인가. 이 질문은 섹스를 부정하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욕망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질문이다. 몸이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가운데 마음이 원하는 것이 숨어 있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밤에는 섹스보다 포옹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어떤 밤에는 대화가 필요하다. 어떤 밤에는 “나는 떠나지 않을게.”라는 말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말을 요구하기 부끄러워 몸으로 대신 요청하기도 한다. 사랑해 줘. 나를 원해줘. 내가 중요하다고 말해줘. 그러나 몸은 이런 문장을 완벽하게 번역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관계에는 언어가 필요하다. 나는 좋은 연인 사이에서 섹스 후의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욕망이 잠잠해진 뒤의 시간. 그 순간 사람의 태도가 보인다. 서둘러 휴대폰을 보는가. 등을 돌리는가. 말없이 잠드는가. 아니면 잠시 상대를 바라보는가. 안아주는가. 물을 건네는가. “괜찮아?”라고 묻는가. 이런 작은 행동을 요즘은 ‘애프터케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나는 더 단순하게 부르고 싶다. 다정함. 섹스가 끝났다고 친밀함까지 끝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끝난 뒤의 몇 분이 그 경험의 의미를 결정하기도 한다. 상대에게 이렇게 느끼게 하는 것. 나는 방금 당신의 몸만 원했던 것이 아니다. 당신이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것이 좋다. 당신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하다. 욕망이 사라진 뒤에도 당신은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다. 이것은 거창한 말이 필요하지 않다. 때로는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미학적으로 생각하면 음악에서 마지막 음은 매우 중요하다. 음악은 마지막 음이 울렸다고 즉시 끝나지 않는다. 음이 사라진 뒤에도 잔향이 남는다. 그 잔향 때문에 우리는 음악 전체를 다시 느낀다. 섹스도 비슷하다. 절정은 마지막 음일 수 있지만 그 뒤에 남는 감정은 잔향이다. 그리고 관계는 그 잔향 속에서 드러난다. 좋은 경험 뒤에는 따뜻함이 남을 수 있다. 편안함. 안심.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감각. 그러나 다른 경험 뒤에는 수치심, 공허함, 불안, 버려진 듯한 느낌이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섹스는 행위가 끝나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뒤에 어떤 감정을 남겼는가까지 포함한다.


종교적 관점에서도 나는 이 ‘이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성서는 인간을 한 순간의 행동으로만 판단하지 않는다. 관계에는 지속성이 있다. 바카라임이 있다. 특히 성은 상대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만나는 일이기에 그 이후의 태도 역시 윤리의 일부다. “나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 에서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친밀함 이후 나는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까지 물어야 한다. 이 질문이 없는 섹스는 쉽게 소비가 된다. 사랑과 섹스 사이에는 하나의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욕망은 순간적일 수 있지만 사람은 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내일이 있다. 기억이 있다. 몸이 기억할 경험이 있다. 그래서 성숙한 욕망은 오늘 밤만 보지 않는다.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내일의 이 사람에게 어떤 기억이 될지도 생각한다. 그것이 바카라임이다. 그러나 섹스 후 외로움을 느낀다고 해서 무조건 잘못된 관계였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감정은 복잡하다. 깊이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친밀함 이후 갑작스러운 공허함이나 슬픔을 경험할 수 있다. 몸의 생리적 변화, 과거의 기억, 애착의 불안,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섞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왜 나만 이러지?”라고 자바카라하기보다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말하고 있지?”라고 물어보는 것. 감정은 판결문이 아니라 신호일 때가 많다.

2877251535c906f6925d2feae5401d5a.gif감정은 판결문이 아니라 신호일 때가 많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상대에게 말하는 것이다. “끝나고 나면 가끔 조금 외로워.” 이 문장은 쉽지 않다. 괜히 상대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릴까 걱정되고, 내가 너무 집착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두렵다. 하지만 좋은 관계에서는 이런 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는 해결사가 될 필요는 없다. 그저 들을 수 있으면 된다. “그랬구나.”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 그 한마디가 몸과 마음 사이에 끊어졌던 다리를 다시 놓기도 한다.


나는 섹스가 사람을 하나로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섹스는 때때로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다른 사람인지 보여준다. 같은 순간을 겪고도 느끼는 것이 다르고, 기대하는 것이 다르고, 기억하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진짜 친밀함은 차이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 차이를 말할 수 있는 상태다. 섹스 후에 외롭다는 말. 그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외로움은 당신이 약해서 생긴 것이 아닐 수 있다. 당신이 몸 이상의 관계를 원한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당신에게 섹스는 사람과 사람의 깊은 연결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을 덜 원하는 사람처럼 바꿀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신이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상대에게도 선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나는 이런 관계를 원한다. 나는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어느 정도 가까워지는 사람이다. 나는 섹스 후에도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상대에게 바카라임을 강요하는 일이 아니다. 나라는 사람의 언어를 알려주는 일이다. 그리고 상대도 자기 언어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맞는 관계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


나는 우리 시대의 섹스가 조금 덜 외로워졌으면 좋겠다. 더 화려해지는 것보다. 더 자유로워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하는 것보다 사람을 덜 혼자 남겨두는 섹스. 그런 친밀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몸을 벗은 사람 앞에서 마음까지 벗으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마음을 조금 보여주었을 때 도망가지 않는 것. 욕망이 끝났다고 사람까지 끝난 것처럼 대하지 않는 것. 서로에게 이런 확신을 주는 것. “당신은 방금 내가 원했던 몸이 아니라 지금도 내가 존중해야 할 한 사람이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진짜 친밀함은 섹스의 한가운데보다 모든 것이 끝난 뒤 두 사람이 조용히 누워 있는 순간에 드러날지도 모른다. 욕망은 잠잠해졌다. 몸도 조금 멀어졌다. 이제 아무것도 얻어낼 필요가 없다. 그때도 상대의 손을 잡고 싶은가.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가. 그 사람이 괜찮기를 바라는가. 그 질문에 사랑의 얼굴이 숨어 있다.


나는 그것을 열세 번째 섹스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좋은 섹스는 두 몸이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가로 완성되지 않는다. 가장 가까웠던 시간이 지나간 뒤에도 두 마음이 서로를 버리지 않는 것. 몸을 나누고도 외롭다면 우리는 더 많은 섹스가 아니라 더 깊은 대화와, 더 분명한 관계와, 더 다정한 연결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피부만으로는 완전히 만나 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을 가진 존재이지만 몸만 가진 존재는 아니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섹스의 마지막은 절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조용히 묻는 순간. “너, 괜찮아?” 그리고 상대가 안심하며 느끼는 것. 아, 나는 사용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만나졌구나. 그것이 어쩌면 몸의 친밀함이 마음의 친밀함으로 건너가는 순간일 것이다.

d11411bab721dc903c94bea8b9be827b.gif좋은 섹스는 두 몸이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가로 완성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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