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고 해서 상대의 몸에 대한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싫어”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침묵은 언제나 동의일까. 망설임은 허락일까. 연인이니까 괜찮은 걸까. 결혼했으니까 서로의 몸은 이미 허락된 것일까. 섹스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욕망과 사랑을 먼저 말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정말 원했는가. 이 질문이 빠지면 아무리 사랑하는 관계라도 섹스는 아름다움을 잃을 수 있다.
동의는 단순히 법적인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해서 상대가 그것에 응해야 할 의무는 없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오래 사귀어도,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상대의 몸은 여전히 상대의 것이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실제 관계에서는 이 당연함이 자주 흐려진다. “우리 사이에 이런 걸 꼭 물어야 해?” “사랑한다면서 왜 거절해?” “전에는 좋다고 했잖아.” 바로 이런 말들 속에서 동의는 조금씩 사라진다.
철학자 칸트는 인간을 단지 수단으로만 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인간은 목적 그 자체다. 이 원칙을 성적 관계에 적용하면 매우 분명해진다. 상대는 나의 욕망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도구도 아니고, 내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시험지도 아니다. 상대에게는 나와 관계없는 자기 자신의 삶과 감각과 의지가 있다. 그러므로 성적 동의의 핵심은 이것이다. 당신의 몸에 관한 결정은 당신이 한다. 그리고 내 몸에 관한 결정은 내가 한다.
이것은 사랑을 차갑게 만드는 원칙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더 깊게 만든다. 왜냐하면 사랑은 권리가 아니라 선택이기 때문이다. 강요받지 않았는데도 나를 선택하는 것. 떠날 수 있는데도 곁에 있는 것. 거절할 수 있는데도 스스로 가까이 오는 것. 그 선택이 있기 때문에 사랑은 아름답다. 상대에게 거절할 자유가 없다면 그 사람의 “예” 역시 진짜 예라고 말하기 어렵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아니요’가 있을 때 비로소 ‘예’도 아름다워진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인을 내가 완전히 이해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존재로 보았다. 타인은 언제나 내 바깥에 남는다. 사랑도 그 사실을 없애지 못한다. 오히려 진짜 사랑이라면 그 타자성을 존중해야 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을 소유하지 않는다. 당신과 가까워졌지만 당신의 몸은 여전히 당신의 것이다. 이 태도는 성적 관계에서 놀라울 정도로 중요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순간에도 상대는 여전히 나와 다른 사람이다. 친밀함은 경계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경계를 존중하면서 가까워지는 일이다.
마르틴 부버는 인간관계를 ‘나-그것’과 ‘나-너’로 구분했다. 동의 없는 섹스는 상대를 쉽게 ‘그것’으로 만든다. 상대가 무엇을 느끼는지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너’의 관계에서는 상대의 반응을 계속 본다. 원하는가. 긴장하고 있는가. 불편한가. 멈추고 싶은가. 그 순간 상대는 내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으로 남는다. 좋은 섹스는 상대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너’로 남겨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동의에서 가장 위험한 오해 중 하나는 “거절하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사람은 여러 이유로 거절하지 못할 수 있다. 상대가 화낼까 봐. 관계가 끝날까 봐. 상대를 실망시키기 싫어서.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서. 혹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어서. 그래서 침묵을 자동으로 동의라고 볼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가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느냐이다.
좋은 동의는 소극적이지 않다. 단순히 “싫지 않다”가 아니라 “나도 원한다”에 가깝다. 여기에는 미묘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한쪽이 요구하고 다른 쪽이 마지못해 받아주는 관계와 두 사람이 모두 서로에게 다가가는 관계는 다르다. 전자는 허용일 수 있지만 후자에는 상호 욕망이 있다. 섹스의 미학은 바로 이 상호성에서 깊어진다.
동의는 한 번 얻으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중간에 마음이 바뀔 수 있다. 아까는 좋았지만 지금은 불편할 수 있다. 어제 허락했다고 해서 오늘도 허락된 것은 아니다. 몸은 과거의 동의를 저장하는 계약서가 아니다. 오늘의 몸에는 오늘의 감정이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상대의 변화된 반응을 읽어야 한다. 동의는 문이 아니라 대화다. 한 번 열었다고 계속 열린 채 있는 문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미셸 푸코의 권력에 대한 통찰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권력은 언제나 폭력적인 명령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미묘하게 작동한다. 나이 차이. 경제적 의존. 직업적 지위. 정서적 의존. 종교적 권위. 슬롯적 영향력. 이런 요소들은 겉으로는 동의가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자유로운 선택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싫으면 싫다고 했겠지.” 이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유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정말 싫다고 말해도 안전했는가.
특히 권력 차이가 큰 관계에서는 동의의 의미가 더 복잡해진다. 교사와 학생. 상사와 부하 직원. 상담자와 내담자. 종교 지도자와 신도. 한쪽이 다른 쪽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단순한 “예”만으로 모든 윤리적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상대가 나를 거절했을 때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윤리는 바로 이런 부분을 묻는다.
섹스에서 동의가 중요한 이유는 몸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은 기억한다. 좋았던 기억도, 두려웠던 기억도, 존중받은 기억도, 무시당한 기억도 남는다. 누군가가 내 경계를 무시했다는 경험은 그 순간 하나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이후의 관계와 욕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상대의 몸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순간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미래까지 존중하는 일이다.
종교는 이 문제에서 오랫동안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기독교는 성적 절제와 바카라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결혼 관계 안에서 한 배우자가 다른 배우자에게 성적 의무를 져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 결과 “부부 사이에는 동의가 필요 없다”는 위험한 생각이 생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랑을 상호 존중이라는 성서의 큰 원칙에서 본다면 이런 생각은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결혼은 몸의 소유권을 넘겨주는 계약이 아니다. 혼인 서약은 서로를 소유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서로를 더 깊이 존중하겠다는 약속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7장은 종종 배우자에게 성적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읽혀왔다. 하지만 당시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남성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상호성을 말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오늘날에는 이 본문을 일방적 요구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와 몸을 서로 배려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유명한 표현처럼 사랑은 자기 유익만을 구하지 않는다. 성적 관계라고 예외일 이유는 없다.
예수의 삶을 보면 사람의 몸을 대하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병든 사람과 슬롯적으로 배제된 사람에게 가까이 갔다. 그러나 그 몸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사람을 병명이나 성적 평판으로만 정의하지 않는다. 특히 당시 슬롯가 여성에게 붙인 낙인을 그 사람 전체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종교가 몸을 대할 때 이 태도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몸을 통제하기 전에 그 몸을 가진 사람의 존엄을 보아야 한다.
『아가서』에는 또 다른 모습이 있다. 남녀가 서로를 원한다. 여성도 적극적으로 욕망을 표현하고, 남성도 여성의 아름다움을 기뻐한다. 상호성이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성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얻는 사건이 아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원할 때 친밀함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좋은 섹스에는 두 명의 주체가 있다. 한 사람의 욕망과 한 사람의 허락이 아니라 두 사람의 욕망과 두 사람의 선택이 있다.
동의를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에로티시즘이 사라질까 걱정한다. “매번 물어보면 분위기가 깨지지 않을까?” 하지만 동의는 반드시 법률 문서처럼 묻는 것이 아니다. 말로도 확인할 수 있고, 표정과 반응을 살피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확신이 없을 때는 묻는 것이 낫다. “괜찮아?” “계속해도 돼?” “어때?” 이런 말이 에로틱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욕망만큼 내 욕망도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은 충분히 에로틱할 수 있다.
에로티시즘은 일방적 정복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욕망을 확인하는 순간에 더 깊어질 수 있다. 내가 당신을 원한다. 그리고 당신도 나를 원한다. 그 사실을 서로 알고 있다. 여기에는 강요가 없다. 추측도 없다. 두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여 가까워지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 이 확신은 몸을 편안하게 만든다. 편안함은 욕망의 적이 아니다. 때로는 욕망이 가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이다.
동의의 미학에는 ‘기다림’도 있다. 원한다고 즉시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마음이 따라올 시간을 주는 것. 그 기다림은 수동적이지 않다.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조르주 바타유가 말한 금지와 경계가 에로티시즘을 만든다는 통찰을 떠올리면 기다림 역시 욕망을 죽이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욕망을 더 깊게 만든다. 바로 가질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원할 때까지 기다리기 때문이다.
연애에서 이런 말이 자주 나온다. “사랑하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니야?” 그러나 이 문장은 사랑을 거래로 바꾸기 쉽다. 내가 너를 사랑했으니 너도 나에게 몸으로 증명해야 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담보로 한 요구다. 사랑은 증명 시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특히 몸으로 사랑을 증명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랑한다고 해서 싫은 것을 해야 할 의무는 없다.
반대로 거절당한 사람의 감정도 무시할 필요는 없다. 거절당하면 서운할 수 있다. 자신이 매력 없게 느껴질 수도 있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을 수도 있다. 그 감정 자체는 자연스럽다. 다만 그 감정을 상대를 압박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됐어. 이제 나도 너한테 아무것도 안 해.” “나 사랑 안 하지?” “다른 사람 생겼어?” 이런 식의 반응은 상대에게 다음번에는 거절하기 어렵다는 학습을 줄 수 있다. 좋은 관계에서는 거절도 안전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사랑의 아주 중요한 시험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나에게 “아니요”라고 했을 때 나는 그 사람을 여전히 존중할 수 있는가. 내 욕망이 좌절된 순간에도 상대의 자유를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은 상대가 나에게 “예”라고 할 때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상대의 “아니요”도 존중할 수 있을 때 사랑은 깊어진다.
동의에는 자기 자신을 아는 능력도 필요하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면 동의를 표현하기 어렵다. 그래서 자기 몸과 감정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나는 지금 정말 원하는가. 외로워서 그러는가. 상대를 잃기 싫어서 따라가는가. 죄바카라감 때문에 허락하는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참는가. 아니면 정말 이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은가. 이 질문에는 누구도 대신 답할 수 없다.
자기 욕망을 아는 것은 이기적인 일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마지못해 “예”라고 한 뒤 상대를 원망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솔직한 “아니요”를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한 사랑일 수 있다. 동의는 상대의 마음만 살피는 일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미학적으로 보면 좋은 관계에는 여백이 있다. 상대가 언제나 나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닫을 수 있는 문이 있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며,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 여백 때문에 가까워지는 순간은 더 특별해진다. 모든 것이 언제나 허락되어 있다면 선택의 의미도 작아진다. 그러나 매번 스스로 선택하여 문을 열어주는 관계에서는 친밀함이 새로워진다.
그래서 나는 동의를 성적 관계의 규칙으로만 보고 싶지 않다. 동의는 사랑의 문법이다. 당신의 몸을 당신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 당신의 감정을 내가 대신 정의하지 않는 것. 당신이 변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나의 욕망보다 당신의 자유가 먼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이것은 ‘이웃 사랑’과도 연결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내 몸이 내 것이고 내 의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상대의 몸과 의사도 그만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황금률도 떠올릴 수 있다. 내가 존중받고 싶은 방식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 그 원리는 침실에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동의를 차갑고 법적인 단어가 아니라 매우 따뜻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싶어.” “당신이 싫어하는 것도 알고 싶어.” “나 때문에 무언가를 억지로 하지 않아도 돼.” 이 말을 들었을 때 사람은 조금 안전해진다. 그리고 안전해진 몸은 더 솔직해질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계를 존중할수록 더 깊은 친밀함이 가능해진다.
좋은 섹스에는 강렬한 욕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욕망보다 더 강한 것이 하나 있어야 한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다. 원하지만 기다릴 수 있고, 가까이 가고 싶지만 멈출 수 있으며, 흥분한 순간에도 상대의 표정을 볼 수 있는 것. 나는 이것을 욕망의 품격이라고 생각한다.
동의란 무엇인가. 단순히 “허락받는 것”이 아니다. 허락이라는 말에는 한 사람은 원하고 다른 사람은 허락한다는 구조가 숨어 있다. 더 아름다운 관계는 그보다 한 걸음 나아간다. 서로가 선택하는 것. 나도 원하고 당신도 원한다. 나도 자유롭고 당신도 자유롭다. 그리고 둘 중 한 사람이 마음을 바꾸면 언제든 멈출 수 있다. 그 자유 안에서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선택한다.
나는 그것을 열한 번째 섹스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좋은 섹스의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당신은 내 사람이니까 괜찮아”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당신의 몸은 여전히 당신의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괜찮은가. 원하는가. 계속해도 되는가. 그리고 상대가 말한다. “응.” 그 짧은 대답이 아름다운 이유는 단순히 허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거절할 자유가 있는 사람이 스스로 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다. 섹스도 소유가 아니다. 둘은 서로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잠시 서로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열어준 것이다. 그 자발적인 열림. 나는 바로 거기에 섹스의 깊은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