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섹스란 무엇인가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얼마나 안전하게 욕망할 수 있는가이다

byNavyblue

좋은 섹스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쉽게 기술을 떠올린다. 얼마나 오래 하는가. 얼마나 능숙한가. 어떤 방법을 알고 있는가. 상대를 얼마나 강하게 흥분시키는가. 그러나 나는 좋은 섹스를 그런 기준으로만 설명하고 싶지 않다. 기술적으로 능숙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텅 비었던 밤도 있을 수 있고, 조금 서툴렀지만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순간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을 바꾸어보고 싶다. 좋은 섹스는 얼마나 잘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순간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의 문제 아닐까.


우리는 섹스를 너무 자주 ‘행위’로 생각한다. 그러나 섹스는 행위 이전에 관계다. 같은 키스도 누구와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고, 같은 포옹도 어떤 관계 안에서 일어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은 위로가 될 수 있지만 원하지 않는 사람의 손길은 침범이 될 수 있다. 몸의 움직임만 보면 비슷해도 경험은 정반대다. 결국 섹스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행위 그 자체보다 관계와 맥락과 마음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능력으로 보았다. 돌봄. 바카라임. 존중. 이해. 나는 이 네 단어가 좋은 섹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상대의 몸을 돌보는가. 내 욕망에 바카라임을 지는가. 상대의 경계를 존중하는가. 상대가 무엇을 느끼는지 이해하려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기술만 이야기하는 것은 음악에서 악보 읽는 법만 가르쳐놓고 음악을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좋은 연주자가 손가락을 빨리 움직이는 사람만은 아니다. 어디서 강하게 연주하고, 어디서 멈추며, 어디에서 침묵할지를 아는 사람이다. 섹스도 그렇다. 계속 움직이는 능력보다 때때로 멈출 줄 아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상대가 긴장하는 것을 느끼면 기다리고, 표정이 달라지면 묻고, 내가 원하는 순간에도 상대가 원하는지 확인하는 것. 좋은 섹스에는 쉼표가 있다.

a951721c65010e87f21547a119010e7d.gif좋은 섹스에는 쉼표가 있다.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나-그것’과 ‘나-너’로 구분했다.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상대는 나를 위한 대상이다. 내게 즐거움을 주고, 내 욕망을 채워주고, 내 기대에 맞아야 한다. 그러나 ‘나-너’의 관계에서는 상대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다. 섹스는 이 두 관계가 가장 쉽게 갈라지는 공간 중 하나다. 상대를 몸으로만 보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그것’이 된다. 반대로 몸을 만지면서도 그 몸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을 계속 느낀다면 ‘너’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섹스의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몸을 만지고 있는가, 아니면 한 사람을 만나고 있는가.


칸트의 유명한 윤리적 원칙을 빌리면 인간을 단순히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아야 한다. 섹스에서 이 원칙은 아주 분명해진다. 상대는 나의 쾌락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한 도구도 아니다. 내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증명하는 도구도 아니다. 그러므로 좋은 섹스에는 일종의 윤리가 있다. 그 윤리는 거창하지 않다. 당신도 원하는가. 여기서 시작한다.


동의는 좋은 섹스의 최소 조건이다. 그러나 최소 조건이 곧 최고의 조건은 아니다. “싫다고 하지 않았으니 괜찮다”와 “서로가 정말 원한다”는 것은 다르다. 좋은 섹스는 거절이 없었던 관계보다 두 사람 모두 ‘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관계에 가깝다. 그리고 그 ‘예’는 언제든 바뀔 수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중간에 불편해질 수 있다. 어제 좋았던 것이 오늘은 싫을 수도 있다. 몸은 계약서가 아니다. 사랑도 영구적인 동의서가 아니다.

image.png동의는 좋은 섹스의 최소 조건이다.

그래서 좋은 섹스에서는 “그만”이라는 말이 안전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말을 했을 때 상대가 삐치지 않고, 화내지 않고, 사랑을 의심하지 않으며, 상대의 거절을 자신의 자존심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멈출 수 있는 관계만이 진짜 가까워질 수 있다. 멈출 수 없으면 그 친밀함은 자유가 아니라 압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시즘을 서로 분리된 존재들이 그 경계를 잠시 넘어서려는 경험과 연결해 보았다. 우리는 섹스를 통해 한 사람과 가장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아무리 가까워져도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나이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다. 몸을 나누어도 생각까지 모두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좋은 섹스에는 하나 됨의 환상과 동시에 둘임을 인정하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인을 내가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존재로 바라본다. 이 철학을 섹스에 적용하면 아주 아름다운 문장이 된다. 가장 가까이 있을 때에도 당신은 여전히 내가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이라고 해서 내 몸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까워질수록 더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친밀함이 깊어진다는 것은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말할 필요가 없어질 만큼 서로가 안전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좋은 섹스에는 안전함이 있다. 이 말은 지루함을 뜻하지 않는다. 안전과 에로티시즘은 반대말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안전하다고 느낄 때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평가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비교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실수해도 조롱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몸의 모양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원하지 않을 때 거절해도 사랑이 철회되지 않는 관계. 그런 안전함이 있을 때 몸은 방어를 조금 내려놓는다.


그리고 바로 그때 욕망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에스더 페렐은 에로티시즘에 자유와 호기심, 놀이가 중요하다고 말해왔다. 놀이에는 재미있는 조건이 있다. 강요되면 놀이가 아니다. 시험이 되는 순간 놀이가 끝난다. 섹스도 그렇다. “잘해야 한다.” “상대를 반드시 만족시켜야 한다.” “이번에는 실패하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몸은 관계에서 빠져나와 자기 자신을 감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친밀함은 성과가 된다.

현대의 성문화는 섹스를 너무 자주 경기처럼 만든다. 횟수. 시간. 체위. 절정. 능력. 그러다 보면 두 사람이 서로를 느끼는 일보다 자기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더 중요해진다. 하지만 좋은 섹스에는 점수판이 없다. 상대에게 몇 번의 오르가슴을 주었는지가 사랑의 점수가 될 수도 없다. 때로 아주 좋은 섹스는 둘 다 절정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이상하게 행복한 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쾌락만이 아니라 친밀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대화다. 성 연구자 존 가트맨의 부부 연구에서도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핵심에는 상대의 내면세계를 계속 알고자 하는 태도와 정서적 반응성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성적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좋은 섹스는 상대의 마음을 읽는 기술이 아니다. 모르는 것을 묻는 능력이다. “이게 좋아?” “어떤 게 더 편해?” “오늘은 어때?” “조금 천천히 할까?” 이런 질문은 분위기를 깨는 말이 아니다. 관계에 따라 오히려 신뢰를 만드는 언어가 된다.


사람들은 흔히 섹스는 말하지 않아야 더 로맨틱하다고 생각한다. 말없이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 오래된 연인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몸과 오늘의 몸은 다르다. 사람은 변하고, 욕망도 변한다. 좋은 연인은 상대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계속 알아간다. “당신은 요즘 어떤가.” 이 질문이 오래된 섹스를 다시 살아 있게 할 수도 있다.


미학적으로 보면 좋은 섹스는 좋은 춤과 닮았다. 춤에는 둘이 있다. 한 사람만 움직인다고 춤이 되지 않는다. 상대의 움직임을 느끼고, 다가가면 받아주고, 물러나면 기다린다. 때로는 내가 이끌고, 때로는 상대의 움직임을 따른다. 두 사람이 완벽히 같은 동작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움직임 사이에서 하나의 리듬을 만들기 때문에 춤이 된다. 섹스도 그렇다. 좋은 섹스는 두 몸이 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몸이 하나의 리듬을 발견하는 일이다.


음악과도 닮았다. 좋은 음악에는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침묵이 있다. 빠른 부분과 느린 부분이 있고, 긴장과 이완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절정이라면 음악은 오히려 지루해진다. 에로티시즘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시선. 대화. 손끝. 망설임. 한 걸음 다가갔다가 잠시 멈추는 시간. 섹스는 침실에서 갑자기 시작되는 사건이 아니다. 어쩌면 그날 아침 상대에게 건넨 다정한 말에서 이미 시작되었을 수 있다.


좋은 섹스에서 중요한 것은 몸의 기술보다 삶의 태도일 때가 많다. 낮에는 상대를 무시하고 밤에는 친밀함을 요구할 수 있을까. 평소에는 말을 듣지 않으면서 침대에서는 상대의 몸을 이해할 수 있을까. 관계의 갈등은 해결하지 않은 채 성적인 친밀함만 요구하면 몸은 마음이 외면당한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욕망은 침실 문 앞에서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낮에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밤의 몸에도 들어온다.


그래서 좋은 섹스는 침대 밖에서 이미 시작된다. 존중. 경청. 감사. 신뢰. 사소한 배려.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태도. 이런 것들이 성적 욕망과 아무 상관없어 보이지만 사실 몸은 관계를 기억한다. 누군가에게 하루 종일 상처받고 밤에 갑자기 몸만 가까워지기는 쉽지 않다. 특히 친밀감과 욕망이 연결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종교는 좋은 섹스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종교가 너무 자주 “하면 되는가, 하면 안 되는가”만 물었던 것은 아쉽다. 성은 규칙만의 문제가 아니다. 관계의 문제다. 성서의 『아가』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원하고 기뻐하는 장면이 나온다.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서로를 찾으며, 서로에게 다가간다. 이 상호성은 중요하다. 성서 한가운데에 몸과 사랑과 욕망을 노래하는 시가 있다는 것은 기독교가 몸을 오직 죄의 대상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에서 부부의 성을 이야기할 때도 당시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는 꽤 이례적인 상호성이 나타난다. 남편에게만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도 관계의 주체로 등장한다. 물론 오늘날의 언어와 윤리로는 더 세밀하게 읽어야 하지만, 적어도 성적 관계를 한쪽의 일방적 권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실마리는 분명하다. 오늘의 언어로 바꾼다면 이렇다. 사랑은 상대의 몸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상대의 몸을 더 소중하게 대할 바카라임을 준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성육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경멸한 것이 아니라 몸을 입었다는 고백이다. 이것은 성에 관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몸은 부끄러운 부속품이 아니다. 몸은 인간이 사랑을 경험하고 세상과 관계 맺는 장소다. 따라서 좋은 성윤리는 몸을 혐오하는 윤리가 아니라 몸을 존엄하게 대하는 윤리여야 한다.


나는 좋은 섹스에는 일종의 경건함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경건하다는 것은 엄숙하거나 종교의식처럼 만들라는 뜻이 아니다. 한 사람의 몸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자기 몸을 내 앞에 드러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신뢰이기 때문이다. 그 몸에는 나이가 있고, 흉터가 있고, 콤플렉스가 있고, 과거의 기억이 있다. 그 몸을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 일부를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섹스는 조금 달라진다.


상대의 몸은 내 욕망의 놀이터이기 전에 한 사람이 평생 살아온 집이다. 좋은 연인은 그 집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문을 두드린다. 초대를 받는다. 그리고 들어간 뒤에도 물건을 마음대로 옮기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몸에 대한 예의라고 부르고 싶다.


좋은 섹스에는 웃음도 있다. 이 이야기도 중요하다. 우리는 섹스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만든다. 완벽해야 할 것 같고, 아름다워 보여야 할 것 같고, 영화처럼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의 몸은 영화와 다르다. 이상한 소리가 날 수도 있고, 동작이 꼬일 수도 있고, 분위기가 깨질 수도 있다. 그때 둘이 웃을 수 있다면 오히려 관계는 더 가까워진다. 완벽함보다 중요한 것은 민망함까지 함께 견딜 수 있는 친밀함이다.


그리고 좋은 섹스는 끝난 뒤에도 계속된다. 이것을 잊기 쉽다. 욕망이 가장 강한 순간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때로 관계의 진실은 끝난 뒤에 더 잘 보인다. 상대에게 등을 돌리는가. 아니면 잠시 안아주는가. 서둘러 자기 세계로 돌아가는가. 아니면 상대의 표정을 한 번 더 보는가. “괜찮아?” “좋았어?” “뭐 불편한 건 없었어?” 끝난 뒤의 몇 분이 앞의 모든 시간을 다르게 기억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그래서 좋은 섹스를 오르가슴으로 정의하고 싶지 않다. 좋은 섹스는 이런 경험에 더 가깝다. 나는 이 사람 앞에서 내 몸으로 존재해도 괜찮았다. 평가받지 않았고,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으며,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었고, 원하지 않는 것도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말을 한 뒤에도 나는 여전히 사랑받고 있었다. 이것보다 더 깊은 친밀함이 있을까.


좋은 섹스는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완벽하게 아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매번 새롭게 묻는 일이다. 오늘의 당신은 어떤가. 오늘의 나는 어떤가. 오늘 우리는 어디까지 가까워지고 싶은가. 사람은 변한다. 몸도 변한다. 욕망도 변한다. 그러므로 좋은 섹스는 완성된 기술이 아니라 계속되는 대화다. 그리고 이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는 세 가지일지도 모른다. “원해.” “괜찮아?” 그리고 “멈춰도 돼.” 첫 번째에는 욕망이 있다. 두 번째에는 배려가 있다. 세 번째에는 자유가 있다. 욕망과 배려와 자유가 함께 있을 때 섹스는 단순한 행위를 넘어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는 사건이 된다.

image.png좋은 섹스는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완벽하게 아는 일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열 번째 섹스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좋은 섹스는 얼마나 화려했는가가 아니다. 얼마나 오래 했는가도 아니다. 얼마나 많은 기술을 알고 있는가도 아니다. 두 사람이 그 순간 얼마나 자유롭고, 안전하고, 솔직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욕망이 가장 강한 순간에도 내 쾌락보다 당신의 존재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좋은 섹스의 가장 아름다운 기술은 어쩌면 기술이 아닐 것이다. 당신의 몸을 만지면서도 끝까지 당신을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 그곳에서 몸은 소비되지 않고, 욕망은 폭력이 되지 않으며, 섹스는 비로소 사랑의 언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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