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에도 취향이 있다

욕망에도 각자의 언어와 속도가 있다

byNavyblue

사랑에도 취향이 있다. 누군가는 자주 만나야 사랑받는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혼자 있을 시간이 있어야 관계가 오래간다. 누군가는 말을 많이 해야 가까워지고, 누군가는 말보다 손을 잡는 것이 더 편하다. 섹스도 그렇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원하지 않는다. 같은 속도로 흥분하지 않고, 같은 접촉을 좋아하지 않으며, 같은 빈도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자신의 욕망을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한다. “이 정도는 당연히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나처럼 원하지 않지?” 하지만 욕망은 정답지가 아니다. 욕망에도 사람마다 다른 문법이 있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가 사용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사랑과 욕망에도 비슷한 점이 있다. 같은 말도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한다. “가까이 있고 싶다”는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대화를 뜻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포옹을, 어떤 사람에게는 성적 친밀함을 뜻한다. 사랑의 언어가 다르듯 욕망의 언어도 다르다. 문제는 이 차이를 서로가 너무 늦게 알게 된다는 데 있다. 사랑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해서 몸의 언어까지 자동으로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_


현대 성 연구는 성적 욕망과 반응에 큰 개인차가 있다는 점을 오래전부터 보여주어 왔다. 누군가는 자발적 욕망이 먼저 생긴다. 아무 계기가 없어도 먼저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반면 어떤 사람은 친밀한 대화, 안전감, 스킨십, 편안한 분위기가 먼저 형성된 뒤에 욕망이 따라온다. 이런 차이를 성 연구자 로즈메리 뱃슨은 여성의 성적 반응 모델을 설명하면서 중요하게 다루었다. 욕망이 언제나 시작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접촉이 먼저이고, 때로는 정서적 연결이 먼저이며, 때로는 그날의 컨디션과 관계의 분위기가 결정적이다. 그러므로 “왜 처음부터 하고 싶지 않아?”라는 질문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 질문일 수 있다. 욕망은 사람마다 다른 문으로 들어온다.

65114f6e5836109b4a4d3fff6be46818.gif욕망은 사람마다 다른 문으로 들어온다.

에스더 페렐은 장기적인 관계에서 에로티시즘은 친밀함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안전함 속에서 욕망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약간의 거리와 새로움이 있어야 욕망이 살아난다. 누군가에게는 익숙함이 편안함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익숙함이 욕망의 긴장을 약화시킨다. 이 차이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면 갈등이 시작된다. 한 사람은 말한다. “왜 예전처럼 원하지 않아?” 다른 사람은 생각한다. “왜 사랑을 성적 빈도로 증명해야 하지?” 사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욕망 언어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욕망의 차이를 사랑의 크기와 연결한다는 데 있다. 상대가 나보다 덜 원하면 나를 덜 사랑한다고 느낀다. 상대가 자주 원하면 나를 몸으로만 보는 것 같다고 느낀다. 하지만 성욕의 빈도와 사랑의 깊이는 직선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사랑하지만 성욕이 적은 사람도 있고, 성적 욕망이 강하지만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구별해야 한다. 얼마나 자주 원하는가와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가는 다른 문제다.


미셸 푸코는 성을 둘러싼 슬롯적 규범이 무엇을 정상이라고 부르고 무엇을 비정상으로 분류하는지 비판적으로 살폈다. 이 관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은근히 이런 기준을 가지고 있다. 정상적인 커플이라면 이 정도 빈도는 있어야 한다. 이런 방식은 보통 좋아해야 한다. 이 나이에는 이 정도 욕망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누가 그 기준을 만들었을까. 평균은 통계일 뿐 개인의 정답은 아니다. 사람은 평균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a7225be2ead60bf0896fb2b3246b76ec.gif사람은 평균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성적 취향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차이 그 자체보다 그 차이를 어떻게 다루는 가이다. 취향이 다를 수 있다. 빈도가 다를 수 있다. 스킨십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편안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불편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러운 차이다. 문제는 한쪽이 자신의 취향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순간 시작된다. “사랑하면 이 정도는 해야지.” 이 문장은 매우 위험하다. 사랑이 상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윤리를 아주 간단히 빌리면 사람을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아야 한다. 성적 관계에서는 이 원칙이 특히 중요하다. 상대는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이 있더라도 그 방식이 상대에게도 괜찮은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 거절은 존중되어야 한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다.


섹스에도 취향이 있다는 말은 무엇이든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자유에는 경계가 있다. 상호 동의. 법적·윤리적 바카라임. 상대의 존엄. 권력관계. 이 기준은 취향보다 먼저다. 취향은 자유롭게 다를 수 있지만 타인의 자유를 침범할 권리까지 취향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이 지점에서 종교적 관점도 흥미롭다. 기독교는 오랫동안 성을 규범 중심으로 다루었다. 무엇을 하면 되는가. 무엇을 하면 안 되는가. 하지만 규칙만으로 관계의 아름다움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성서가 사랑을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핵심은 타인을 자기 자신처럼 대하는 태도다.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 원칙을 성적 관계에 적용하면 질문은 단순해진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강요하고 있는가. 상대의 감각과 경계를 내 것만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 욕망을 사랑으로 바꾸는 것은 규칙의 개수가 아니라 상대의 존재를 얼마나 진지하게 존중하는가일 수 있다.


『아가서』에는 상호성이 있다. 한쪽만 원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서로를 찾고, 서로에게 다가간다. 여기에는 일방적 소비보다 상호적 욕망이 있다. 이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두 사람 모두가 주체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표현하는 사람과 받아주는 사람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랑은 독백이 아니라 대화가 된다.


마르틴 부버의 ‘나-너’ 관계를 생각해 보면 성적 친밀함은 가장 깊은 ‘나-너’ 관계가 될 수도 있고 가장 쉽게 ‘나-그것’ 관계로 무너질 수도 있다. 상대가 나에게 무엇을 주는지에만 관심을 가지면 그 사람은 기능이 된다. 하지만 상대의 느낌과 반응과 감정을 함께 보는 순간 그 사람은 다시 ‘너’가 된다. 섹스에도 취향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를 기능에서 사람으로 돌려놓는 일이다.


연애 초기에는 서로의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호기심이 크고, 새로움이 있고, 상대를 맞추려는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각자의 리듬이 드러난다. 한 사람은 더 자주 원하고, 한 사람은 덜 원한다. 한 사람은 즉흥적이고, 한 사람은 준비가 필요하다. 한 사람은 스킨십이 매우 중요하고, 한 사람은 대화가 먼저 필요하다. 이때 많은 커플이 누가 정상인가를 따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더 좋은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어떻게 함께 살아낼 것인가.


여기에는 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성에 관한 대화는 생각보다 어렵다. 사람들은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몸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못한다.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싫은지. 언제 부담스러운지. 무엇이 불안한지. 어떤 접촉이 편안한지. 말하면 상대를 실망시킬까 봐 침묵한다. 그런데 침묵은 배려처럼 보이지만 오래되면 오해가 된다.


좋은 성적 관계는 상대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안전함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런 게 좋아.” “나는 그건 좀 불편해.” “나는 조금 더 천천히 가고 싶어.” “요즘은 예전보다 욕망이 줄었어.” 이런 문장을 말했을 때 상대가 공격받았다고 느끼지 않는 관계. 그 관계는 이미 꽤 성숙하다.


취향에는 변화도 있다. 사람은 평생 같은 방식으로 욕망하지 않는다. 나이, 건강, 스트레스, 출산, 질병, 약물, 관계의 변화, 자기 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욕망도 바뀐다. 젊을 때 좋았던 것이 나이가 들어서는 달라질 수 있다. 과거에 싫었던 것이 신뢰가 깊어진 뒤에는 편안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취향을 정체성처럼 고정할 필요도 없다. 몸은 살아 있기 때문에 취향도 움직인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욕망을 단순히 결핍에서만 이해하지 않았다. 욕망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힘이기도 하다. 나는 이 관점이 좋다. 욕망은 부족해서 생기는 것만이 아니다. 욕망은 관계를 만들고, 언어를 만들고, 새로운 친밀함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좋은 성적 관계란 서로의 욕망을 맞추는 관계라기보다 서로 다른 욕망 사이에서 새로운 언어를 함께 만들어가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음악을 생각해 보면 쉽다. 한 사람은 재즈를 좋아하고, 한 사람은 클래식을 좋아한다. 같은 취향이면 편하다. 하지만 취향이 다르다고 관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서로의 음악을 들어볼 수 있고, 함께 좋아하는 곡을 발견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내 음악만 들어.”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섹스도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고 실패가 아니다. 대화할 수 없을 때 문제가 된다.

ce8bc1c6143718f46550958e2fc4ebdc.gif대화할 수 없을 때 문제가 된다.

다만 모든 차이가 반드시 조율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사실도 솔직해야 한다. 성은 관계에서 중요한 영역이기 때문에 욕구 차이가 너무 크고 지속된다면 실제 갈등이 생길 수 있다. 이때 무조건 참는 것이 답은 아니다. 한쪽이 평생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거나 다른 쪽이 원하지 않는 관계를 계속 받아들이는 것은 좋은 해결이 아니다. 때로는 상담이 필요하고, 관계를 새롭게 협상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관계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할 수도 있다. 사랑이 있다고 해서 모든 차이가 자동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서로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넌 너무 밝혀.” “넌 왜 이렇게 무관심해?” 이런 말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상대의 욕망을 수치로 만든다. 욕망이 많은 사람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고, 욕망이 적은 사람도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바꾸면 관계가 달라진다. “왜 너는 나와 다르지?”가 아니라 “당신은 어떻게 욕망하는 사람인가?” 이 질문에는 비난 대신 호기심이 있다.


미학에서 취향은 흥미로운 문제다. 칸트는 아름다움의 판단이 주관적이면서도 우리가 다른 사람의 동의를 기대한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나는 이것이 아름답다고 느껴.” 그런데 동시에 다른 사람도 그렇게 느끼기를 은근히 기대한다. 욕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나는 이게 좋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당신도 당연히 좋아하겠지.” 그러나 상대는 다를 수 있다. 그 차이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타인을 만난다. 상대는 나의 복사본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번역이 필요하다. 내 욕망을 상대의 언어로 번역하고, 상대의 욕망을 내 언어로 이해하려 노력한다. 번역은 완벽하지 않다. 언제나 조금의 오해가 남는다. 하지만 좋은 번역은 원문을 없애지 않는다. 상대를 내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다름을 보존하면서 이해하려고 한다. 나는 이것이 사랑의 중요한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성적 취향을 존중한다는 것은 무조건 맞춰준다는 뜻이 아니다. 나에게도 경계가 있다. 좋은 관계는 한쪽이 모든 것을 양보하는 관계가 아니다. 두 사람이 모두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나는 이것까지는 원하지 않아.” 그리고 그 말 때문에 관계가 위협받지 않아야 한다. 동의는 타협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한다.


나는 좋은 섹스가 두 사람이 완벽하게 같은 것을 좋아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두 몸이 묻고, 듣고, 조율하고, 기다리며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춤과 비슷하다. 춤을 잘 추는 두 사람은 처음부터 완벽히 같은 동작을 아는 사람들이 아니다. 상대의 움직임을 느낀다. 너무 빨리 가지 않고, 뒤처지면 기다리고, 때로는 이끌고, 때로는 따라간다. 좋은 성적 관계에도 그런 리듬이 있다.


종교는 인간의 차이를 불편해할 때가 있다. 모두에게 하나의 규범을 적용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조 세계를 보면 하나님이 다양성을 꽤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꽃도 하나가 아니고, 얼굴도 하나가 아니며, 성격도 하나가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친밀함 역시 획일적인 방식 하나로만 표현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자유에는 바카라임이 따른다. 그러나 바카라임 있는 다양성과 획일성은 다르다.


성숙한 신앙이 묻는 질문도 “남들도 이렇게 하는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관계 안에 존중이 있는가. 강요가 없는가. 정직함이 있는가. 서로의 몸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있는가. 사랑과 바카라임이 있는가. 이 질문들이 더 중요하다.


사람마다 욕망의 언어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조금 편안해진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상대도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다를 수 있다. 문제는 차이가 아니라 차이를 모른 척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당신에게 친밀함은 뭐야?” “당신은 언제 가장 사랑받는다고 느껴?” “어떤 접촉이 좋아?” “언제는 혼자 있고 싶어?” “요즘 당신의 욕망은 어때?” 이 질문들은 조금 민망하다. 하지만 어쩌면 “사랑해”라는 말보다 관계를 더 깊게 만들 수도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계속 알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섹스에도 취향이 있다.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섹스는 시험에서 대화로 바뀐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고, 평균을 맞춰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난다. 그 대신 질문이 생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 두 질문 사이에서 두 사람만의 친밀함이 만들어진다.


나는 그것을 아홉 번째 섹스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좋은 섹스는 정답을 아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욕망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고,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무조건 흉내 내지도 않으며, 둘 사이에서 우리만의 속도와 언어와 리듬을 찾는 것. 사랑은 같은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인 채로 가까워지는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욕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궁금해지는 순간인지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사랑받고 싶어?” 그 질문에서 섹스는 기술을 넘어 관계가 된다.

4ef22b2dd19b69c4fd906df0b6798a8d.gif좋은 섹스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욕망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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