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배우는 중입니다.

- 아이의 작은 손에서 피어나는 마음 -

by홍당무

아이들은 어쩜 주말만 되면 더 부지런해지는지, 평소 학교 가는 날이면 깨워도 일어나지 않던 아이들이 알아서 척척 일어난다. 그리고 잠시 후 쿵쿵 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 이윽고 안방 문이 열린다. “엄마 배고파요. 밥 주세요.” 이렇게 나의 주말은 시작된다.


이번 주말 역시 아침 일찍 일어난 아이들의 신호로 시작되었다. 다만 '배고파요'가 아닌 다른 말로 시작되었지만.


“엄마, 재료 왔어요? 문 앞에 배송 온 것 같은데요. 빨리 열어봐요. 상해요 재료가.”

“아... 인우야, 엄마 피곤해. 30분만 있다가 나갈게.”

“안 돼요. 재료 상해요 빨리요.”

“안 상해. 얼음팩으로 다 되어 있으니까. 걱정 마.”

“안 돼요. 엄마 얼른요.”

“...”


사건은 며칠 전에 시작되었다.

집에 돌아온 첫째는 다짜고짜 집에 식빵, 연유, 버터가 있는지 물었다. 이유는 친구가 만든 빵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엄마 아빠에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일단 재료가 하나도 없었기에 사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솔직히 귀찮았다. 사고, 만들고, 그 과정에서 위험하고, 어질러지면 치워야 하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나로서는 번거로웠다. 그냥 안 사고, 안 먹고, 안 치우면 될 일이거늘. 아이는 반짝이는 눈동자와 흥분된 목소리로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해맑은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참 오랜만의 미소였다. 요즘 사춘기가 한창인지 좀처럼 웃는 표정 하나 없이 미운 말만 내뱉던 아이였는데, 게임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대신 식재료는 건강한 것 위주로 엄마가 산다는 합의하에 주문을 한 것이다.


아이가 안전하게 요리할 수 있도록 에어프라이어기 사용법을 가르치고, 필요한 도구 중 안전한 것들로 골라 깨끗이 씻어 사용하기 편하도록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내가 할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안 본 눈!


형의 일에 동생이 빠질 리 없었다. 둘째는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로 가더니 손을 씻었다며 어느 순간 형 옆에 와 있었다.


“형아 나 손 깨끗이 씻었어. 나 뭐 할까?”

“너도 하려고?”

“응”

“그래 그럼 이것을….”


10살짜리 아이까지 합세하니 불안은 배가 되었다. 지금이라도 못하게 하고 싶었지만 저렇게 신나 하는데 다짜고짜 막는 것도 능사는 아니었다. 아이들을 믿고 나만 참으면 될 일. 그렇게 '안 본 눈'을 위해 조금 더 눈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키키키키

우당탕탕

크크크크

덜컹덜컹

팍.


안방 문 너머로 온갖 소리가 난무했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맞춰 내 몸은 들썩들썩, 안절부절, 지리리릿, 내 몸의 온갖 소리가 총 출동해 내 몸과 마음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가볼까? 지금? 아니 괜찮겠지. 문제가 있었으면 불렀겠지. 언제 끝나지? 끝날 때 안 됐나?’


거실에 있으면 사사건건 잔소리하며 결국 아이들에게 화를 낼 것이 분명해 문을 닫고 안방으로 들어왔건만, 후회스러웠다. 나는 그렇게 밖으로 나가고 싶은 팔과 다리를 묶어 두느라 혼자만의 싸움을 해야 했다.


이렇게나 아이들을 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가!


읽고 있던 바카라은 정말이지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카라을 덮고 드라마도 켜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평소 드라마 광인 내가 드라마를 재미없다고 느끼다니. 그렇게 약 30분 후, 드디어 소리가 멈췄다. 끝났나 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잡았다. 혹시나 엄마 몰래 사고 수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용히 문고리를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먹음직스러운 고소한 냄새가 코 끝을 간지럽혔다. 흡사 여행지의 숨어 있는 유명 빵집 냄새를 맡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서로의 탓만 하던 투덕거리는 소리가 아닌, 귀여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몸과 마음을 꽁꽁 묶고 있던 무언가가 탁하고 풀어졌다. 가슴 언저리를 맴돌던 무거운 한숨도 그 사이 픽 새어 나왔다. 순간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향긋하고 기분 좋은 향에 이끌려 가벼운 발걸음을 주방으로 옮겼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요리를 그릇에 담고 있었다. 탑처럼 쌓을지, 모자이크 모양으로 놓을지 고개를 숙여 나라를 구하듯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상의하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까끌까끌 밤톨 같은 검은 머리에서 행복한 오로라가 뭉게뭉게 퍼져 나왔다.


‘사랑스럽다는데 이런 거구나.’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이 딱 마주친 첫째가 말했다.


“엄마! 이것 보세요! 완전 맛있어요!”

“응? 그래?”

“엄마. 엄마 아~”

“시우야. 그래. 아~”


‘오잉? 맛있네."


아이들이 많이 크긴 했나 보다. 어렸을 때와 달리 장난으로 끝나지도, 주방을 어질러 놓지도 않고 이렇게 그럴듯한 완성작을 내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심지어 설거지도 해 놓았다.


요리 후 두 아이는 부쩍 친해져 있었고, 웃으며 다음 요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평소 게임 이야기가 아니면 서로를 고자질하고 놀리는 말뿐이었던 아이들이었기에, 사이좋게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이 신기했다.


“시우야, 우리 다음에 다른 것도 만들까?”

“형아 우리 또 하자. 재밌어.”

“오케이. 우리 같이 공부할래? 내가 수학 알려줄까?”

“오키"


첫째가 기분이 좋으니, 둘째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다는 기특한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뿐이었는데. 물론 그것을 준비해 주고 지켜보는 과정이 조금 고달프기는 했지만, 그래도 결과가 이 정도라면 몇 번이고 참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내가 아이들을 참 많이도 억눌렀나 보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그저 걱정이었다.


‘아이들이 싸울까 봐. 다칠까 봐. 실패하는 자신에게 실망할까 봐. 내가 청소하는 게 번거로워질까 봐.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그리고 나 말고 조금 더 에너지 많고 긍정적인 엄마를 만났다면 아이들은 더 행복했까?...’


습관처럼 또다시 내 탓이라는 마음이 밑바닥부터 밀려 올라왔다. 즐거운 듯 웃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 역시 마주 보고 웃었지만, 가슴 한편에는 영문 모를 무거운 돌덩이가 묵직하게 자리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릿한 통증을 만들었고 물결처럼 온 마음으로 서서히 번졌다. 살짝 끌어올린 입꼬리가 무색하게, 눈은 뜨겁게 흐려지고 있었다.


그때 향긋한 냄새가 가까워지더니 냄새는 더 진해서 어느 순간 코 앞까지 왔다. 입술에 닿는 건조하고도 사랑스러운 느낌. 따뜻한 빵이 입안으로 쑥 들어왔다.


“엄마 시우 것도 먹었으니 제 것도 드셔보세요.”


그 고소하고 다정한 맛에 눈가에 애써 멈춰있던 눈물이 뜨겁게 툭, 식탁을 적시며 떨어졌다.


“엄마 맛이 없어요? 실패인가?”

“아니. 인우야 맛있다. 빵집에서 파는 것보다 맛있는데!”

“정말요? 내일 또 만들래요.”

“크크 그래.”


식탁에 떨어진 눈물방울이 유난히도 반짝였다.

놀란 나는 손바닥으로 떨어진 눈물을 재빨리 훔친 후, 애써 웃음을 지으며 빵을 몇 조각 더 입에 넣었다. 최근에 먹은 빵 중에 정말 최고로 맛있었다.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도 맛있었는지 손을 씻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반 이상 먹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소란스럽지 않은 온기가 묘하게 마음을 간지럽혔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이었다.


쿵쿵쿵.


오늘도 주말 아침을 깨우는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 또 시작이네. 주말인데 늦잠 좀 자지!’


“엄마, 어제 만들고 난 재료 남아 있죠?”

“응 왜?”

“할아버지 할머니 만들어 드릴래요. 드시라고요.”

“.....”


평소 용돈을 받아도, 본인이 좋아하는 떡볶이를 만들어다 줘도 받기만 할 뿐 아무리 가르쳐도 감사 전화 한번 자발적으로 하지 않던 아이였다.


‘내 아들 맞나...’


할아버지 할머니께 만들어 드린다는 아이의 말이 귓가를 스치는 순간, 조용히 흐르던 주말 아침의 시간이 뚝 멈춰 서 버렸다. 당혹스러움과 벅참이 뒤섞여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낸 아이가 놀랍고 자랑스럽다가, 다시 한번 ‘안 본 눈’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와 동시에 멈춰있던 시간도 다시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뒤, 아이는 이번에는 더 완벽하고 맛있게, 게다가 어른들의 건강에도 좋게 만들겠다며 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오븐의 온도와 시간 그리고 역할분담까지 나름의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또다시 얼마간의 ‘안 본 눈 후’의 시간이 흐른 후, 아이는 완성된 작품을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아들 덕분에 주말부터 운전을 해야 했지만, 깜짝 놀란 부모님은 연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셨다. 아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칭찬과 덤으로 용돈까지 받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인우야, 그런데 왜 갑자기 요리하겠다고 한 거야?”

“맛있는 거 먹으니까, 그냥 엄마 아빠도 같이 드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 그래? 감동인데? 엄마도 맛있는 거 먹으면 인우가 생각나는데.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고.”

“정말요? 감. 사. 합. 니. 다.”


아들은 쑥스러운지 로봇과 같은 말투로 감사를 표현했다.

또박또박 들려오는 ‘감. 사. 합. 니. 다.’라는 다섯 글자가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동안 아들 때문에 차곡차곡 얼어붙어 틈조차 없던 마음이 그 말 한마디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입 속에서 오래도록 음미하듯, 소화되어 나가려는 그 말을 귀가 아닌 마음의 입으로 꼭꼭 씹고 또 씹었다. 단단한 음식물이 부드러운 액체로 녹아 내려가 전신의 혈액 구석구석에 좋은 영양분을 전달하듯, 아들의 마음이 나의 온몸을 부드럽게 가득 채웠다.


‘와, 정말 참 많이 컸다.’


좋은 것을 보면 함께 나누고 싶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기꺼이 내어주고 싶은 마음. 그 귀한 마음이 아이의 맑은 눈망울 속에서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의 가슴속에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 피어나고 있나 보다.


그 마음이 점점 더 예쁘고 찬란하게 아이의 가슴속에서 피어나기를.

짜증과 화로 달구어진 아들의 뜨거운 마음이, 세상을 사랑하는 그 시원하고 달콤한 향으로 가득하길. 그리고 그것이 아들의 삶까지 예쁘게 물들이길.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저녁 설거지를 하다 말고 문득 아이들의 예쁜 마음이 생각나 울컥함이 밀려왔다.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에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예쁘게 담고는 아이들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순간 후다닥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너희 게임했지!”

“아닌데요. 안 했어요!”


‘하하 그러면 그렇지.’

허탈한 마음에 기운이 쏙 빠지긴 했지만, 여느 날처럼 자세를 고쳐 서고 아랫배에 단단히 힘을 주고는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냈다.


몰래 게임을 해 놓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괘씸했지만, 다시 생각했다. 아이들은 각자의 속도대로 나아지고 있고 사랑을 배우며 조금씩 자라고 있다고 말이다. 가끔 엄마 아빠를 속상하게 하긴 해도 마음 밑바닥에는 예쁜 꽃과 나비 그리고 반짝이는 별빛이 한가득 피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아이들은 지금 사랑을 배워가며 나름 잘 자라고 있다고, 그러니 잘 살고 있다고 다시 한번 나 스스로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본다.


‘그래, 아들은 지금 사랑을 배우는 중이야.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잘 자라고 있어. 그러니 나도 참 잘 해내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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